[MT리포트]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제 논란(下)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 책임제를 도입하면 은행, 상호금융 등 금융회사들이 연간 2800억원에 달하는 부담을 질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제도가 도입돼도 사기 예방 효과는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융당국이 벤치마킹 사례로 삼은 영국에서도 제도 도입 후 환급률 자체는 늘어난 한편, 금융사기의 규모를 줄이는데는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이에 전문가들은 배상책임을 의무화하는 규제가 금융사기의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15일 금융권과 국회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 책임제 도입으로 국내 금융회사가 배상해야하는 금액은 연간 최대 2811억원으로 전망된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 책임제를 담은 통신사기피해환급 개정안은 강준현·조인철 더불어민주당 발의안 두 가지로 피해보상 한도에 차이가 있다. 강준현 의원안은 피해보상 한도를 5000만원 이하로, 조인철 의원안은 1000만원 이상으로 한도 금액을 정하고 있다. 금융위는 두 안을 절충해 1000만원 이상 5000만원 이하의 범위에서 구체적인 법정 보상가액 기준을 정할 방침이다.
금융위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5000만원이 상한으로 설정했을 때를 가정하면 은행, 상호금융 등 금융회사가 부담해야 할 배상 규모는 2811억원으로 추산된다. 2024년 보이스피싱 사건 통계를 기준으로 피해액이 5000만원을 초과한 2160명에게 5000만원씩, 피해액이 5000만원 이하인 피해자에겐 전액을 지급한다는 가정이 반영됐다. 1000만원으로 상한이 설정될 경우엔 1098억원을 배상액으로 내게된다.
배상 책임제가 도입되면 금융회사들이 짊어져야 할 자금 부담이 1098억~2811억원에 달하는 가운데 제도를 선제적으로 도입한 영국에서도 금융사기 예방 효과는 미미했다. 영국은 지난 2024년 지급자승인형 푸시결제(APP) 사기에 따른 피해가 발생하면 금융회사가 의무적으로 피해액을 배상하는 이른바 'APP 사기 배상제'를 도입했다. 금융위는 이번 제도 설계에서 영국을 벤치마킹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기자간담회에서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책임은 영국 같은 경우도 도입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영국 금융회사들은 피해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8만5000파운드(1억6000만원) 한도 내 에서 송금은행과 수취은행이 분담해 피해액을 배상해야 한다. 피해자가 사기 행위에 가담하거나, 은행이 여러차례에 걸쳐 경고를 했음에도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하는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금융회사는 배상 책임을 피할 수 있다. 소비자 분쟁으로 이어질 경우엔 보상 한도가 최대 43만파운드(7억8000만원)까지 높아질 수 있다.
독자들의 PICK!
배상이 의무화되면서 당연히 금융사기 피해액 대비 환급률은 개선됐다. 영국 감독기구인 결제시스템규제청(PSR)의 연구용역 보고서 따르면 도입 전 54%(2023년 4월~2024년 9월)에서 65%(2025년 1~9월)로 11%포인트(P) 상승했다.
그러나 금융사기 피해 규모는 오히려 증가했다. 현지 민간 금융산업협회인 UK 파이낸스가 발간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APP 금융사기 피해액 규모는 5억7640만파운드로 전년동기대비 19% 증가했다. 건수로 따져도 24만8070건으로 7% 더 늘었다. 의무 배상 대상인 FPS(신속지급결제시스템)와 CHAPS(은행간 결제시스템)를 통한 APP 사기 피해액은 각각 20%, 11%씩 뛰었다.
효과는 미지수지만 금융회사들이 치를 비용은 예상치를 뛰어넘을 수 있다. 영국 금융회사들은 사기 예방, 민원 및 분쟁 관리, 보고 및 규정 준수에 따라 수반되는 행정 비용은 연간 약 4400만~5600만파운드(800억~1000억원)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의 분석도 무과실 배상 책임제도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재확인해준다. UK파이낸스 보고서는 환급율 증가로 피해자 구제에 효과가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도 사기 발생을 막진 못한다고 선을 그었다.
김나율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12월 보고서를 통해 "의무 배상제도를 도입한 후에 범죄 수법이 조직적이고 대형화되는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국 사례를 통해 은행 등 결제 서비스 제공자를 대상으로 하는 엄격한 배상책임 규제제도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는 있다"면서도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과 동시에 디지털 플랫폼과 통신망 등 사기범의 접근 경로를 차단하는 사전 예방 제도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금융회사에 보이스피싱 피해의 무과실 배상책임을 지우는 대신 '새도약기금'과 같이 공동기금을 조성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금융회사뿐 아니라 통신사와 정부 등 보이스피싱 예방·수사에 역할을 가진 주체들이 함께 재원을 출연하고, 기금이 피해자에게 우선 보상하는 구조다. 피해구제는 신속하게 하고 특정 업권에만 책임을 집중시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무과실 배상 책임제의 대안으로 금융·통신·공공 부문이 함께 출연하는 '보이스피싱 피해보상기금'을 신설하는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지난해 출범한 새도약기금처럼 별도 법인을 설립해 재원을 부담하는 구조가 힘을 받고 있다.
공동기금의 핵심은 보이스피싱 발생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금융회사와 통신사, 정부가 각각의 역할에 따라 기금에 출연하는 것이다. 금융회사와 통신사의 경우 과거 보이스피싱 사고에서 각각 어느 정도의 과실이 있었는지 분석해 출연비율을 정한다. 특히 4000억원을 출연한 새도약기금의 사례처럼 정부의 재정도 초기 기금 안정을 위해 투입할 수 있다.
향후 출연비율은 기금 운영 이후 사고에서 과실이나 내부통제 소홀이 확인되는 업권에 과중 반영하는 방식이다. 사고 예방을 위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수록 기금 부담이 커지는 셈이다. 무과실 배상 책임제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되는 통신사의 '프리 라이딩' 우려를 벗을 수 있는 방식이다.
이후 정부 재정의 경우에는 보이스피싱 범죄수익 환수금과 관련 과징금을 우선적으로 기금에 활용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회수된 자금을 다시 기금에 넣는 구조를 만들면 지속적인 피해구제가 가능해진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지 않은 국민에게까지 비용이 전가될 수 있다는 형평성 문제도 줄이는 방식이다.
기금 운용을 위해서 새도약기금의 사례처럼 별도 법인도 수립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새도약기금은 금융위원회가 감독하는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새도약기금' 법인을 설립해 독립적으로 기금 관리와 장기연체채권 매입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별도 법인이 설립되면 피해자에게 먼저 보상한 뒤 피해금 회수에 나서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회수 전담 조직을 꾸리면 보상 이후 범죄자뿐 아니라 해당 피해 발생에 과실이나 관리소홀 책임이 있는 금융회사·통신사·계좌명의인 등을 상대로 피해금 회수를 추진할 수 있다. 반면 무과실 배상 책임제의 경우 금융사에 보이스피싱 조직을 상대로 청구권이 생기지만, 대금을 회수할 수단은 없기 때문에 금융권 일각에서는 '배임'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피해자 입장에서도 장점이 분명하다. 우선 피해 보상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무과실 책임 배상제의 경우 금융회사마다 서로 다른 내부 의견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기금 법인이 설립되면 통일된 절차에 따라 보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금융회사별로 다른 보상 기준에 따라 유사한 피해에 대해 서로 다른 보상을 받게 되는 형평성 문제도 감소할 수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기금 법인을 설립하면 해외 범죄조직을 대상으로 소송에도 적극 나서는 등 환수 수단이 다양해진다"라며 "기관별 출연비율 등을 감안해 이해관계자들을 참여시켜 책임을 분담해 피해보상 뿐만 아니라 사후 조치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