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임금에게 휘둘리지 않고 목숨까지 내놓으며 공정한 기록을 남긴 사관들의 노력 덕분이다.
성군으로 불린 세종대왕조차 자신의 처가식구들과 이복형제를 죽인 아버지 태종의 기록을 보지 못했다. 세종은 여러 차례 실록 편수관들에게 기초자료인 사초를 가져오라고 어명을 내렸지만 허사였다. 실록 곳곳에는 어명을 거부하는 사관들 때문에 세종이 낯뜨거워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무자비했다는 태종도 사관들에게는 두 손을 들었다. 밀실에서 신하와 중요 국정을 논의하는데 사관들이 문지방까지 뚫고 그 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고 별다른 손도 쓰지 못했다. 신하들의 상소와 임금의 잘잘못을 건의하는 사간원의 항의가 빗발친 때문이다. 실록이 꾸밈없는 역사서로 세계적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사관 등이 지켜낸 독립성에 있다.
최근 통화정책을 놓고 벌어지는 정부와 한국은행의 모습을 보면 경제가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법적으로 독립된 한은이 성장률 제고에 목마른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는 형국이다.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 등 외부 요인으로 인해 물가가 오른 만큼 일정한 상승률은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부 측에서 나온다. 한은이 물가 안정에만 집착해 금리를 내리지 않고 있다는 '압력'으로 해석된다.
한은의 분위기는 침울하다. 한 고위 관계자는 "다음달 임기 만료로 교체되는 3명의 금융통화위원에 아무래도 친 정부 성향의 인사들이 올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이들이 한은 점령군이 될 것이라는 자조섞인 얘기도 흘러나온다. 그래서 5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는 금리인하 결정이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글로벌 신용경색 여파로 힘겨운 출발을 하게 된 새 정부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종 대부자'인 한은의 위상이 흔들릴 경우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한은의 책무 역시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