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친구의 아버지는 은행원이다. 상고를 졸업하고 20살 남짓 되던 때 한국은행에 취직했고 지방의 한 저축은행 총괄 업무를 맡고 있는 현재는 70세쯤 되셨으니 50년째 은행원이다.
물론 은행원이 아닌 적도 있긴 했다. 상호신용금고가 '저축은행'이라는 명칭을 얻기 전에는 스스로를 은행원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금고가 저축은행으로 바뀐 것이 2002년이고 10년쯤 됐으니 그 전 십수년간을 은행원이라도 해도 무방할 터다.
한은에서 일 잘하는 행원이었던 친구의 아버지는 능력보다 대학 졸업장이 우대받는 것을 보고 내 사업을 생각했다고 한다. 은행원으로 시작했으니 내 일을 하더라도 사장보다는 행장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당시 신용금고가 맨손으로 시작한 개인으로 할 수 있는 금융사로 적당해 보였다. 몇몇 사람들과 의기투합했고 90년대 초 현재 저축은행의 대표사원이 됐다. 마침 그 곳과 외아들은 같은 해에 나고 생긴 동갑이었다. 내 자식 같았다.
직장 꾸려가느라 아들에게도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주지 못 했지만 자식같은 은행에는 무리해서 값비싼 약도 먹이고 고액 과외도 받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 했다. 아니 안 그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무리한 지점 확장과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지방 토호들과의 결탁 등은 엉터리 보약 같아 보였다. 당장의 효험도 모르겠고 은행이 장년이 됐을 때, 손자가 생길 때 어떨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지점을 한두개씩 늘린 것은 4년 전, 막 거품이 꺼질 때부터다. 어려웠지만 고객과의 접점은 늘어났다. 예금을 더 받겠다는 목적보다는 신용대출, 학자금대출, 담보대출같은 여신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올해 초부터 영업정지다 검찰수사다 이어지다 보니 저축은행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개인 비리가 알려져도, 매각되고 껍데기뿐인 저축은행이 형식적 파산절차를 밟는다고 해도 '또 돈 인출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서지 않을까' 움찔한다.
노은행원은 아름다운 '서민'이 돈 때문에 쩔쩔매지 않고 풍요로와졌으면 하는 꿈을 꾼다. '저축은행 고객들도 형편이 나아져 높기 만한 은행 문턱을 넘었으면…' 한푼이라도 싸게 돈을 빌려주지 못해 안타까와 하는, 아버지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