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 재계, 국민 각계의 추모와 장례위원회 구성, 통합과 화합의 의미를 조명하며 YS의 업적과 시대적 의미를 되새깁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 재계, 국민 각계의 추모와 장례위원회 구성, 통합과 화합의 의미를 조명하며 YS의 업적과 시대적 의미를 되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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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은 수십 년 간에 걸친 한국의 군부독재 정권을 교체하고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뉴욕타임스(NYT) 등 전세계 주요 언론들이 22일(현지시간)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알리며 공과 과(過)를 소개했다. NYT는 1993~1998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김 전 대통령이 패혈증 등으로 87세 일기로 이날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을 한국의 마지막 군사 정권을 교체하고 금융실명제 등 획기적 개혁을 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공영 BBC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수 십년 동안 군부 독재에 맞섰고 민주화를 위해 힘썼으며 1980년대에 두 차례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김 전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서울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했으며 독도에 선박 접안시설을 건설해 실효 지배를 강화했다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또 김 전 대통령의 과에 대해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장과 국민장이 국가장으로 통합된 후 첫 국가장 대상이 됐다.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장으로, 최규하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각각 장례를 치렀다. '국장과 국민장에 관한 법률'에서 국장은 9일, 국민장은 7일로 장례기간이 규정되는 등 장례절차에 차등이 있었다. 지난해 말 이 법이 국가장법으로 통합 개정되면서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러지게 됐다. 국가장은 전·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 그리고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사람으로 대상으로 한다. 구체적인 장례 일정과 절차 등은 행정자치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결정되며 국가장이 결정되면 빈소의 설치 운영, 운구와 영결식, 안장식 등 장례의 모든 과정을 정부가 주관한다. 장례 기간은 5일 이내이며 천재지변 등 불가피한 사정이 있으면 연장할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은 22일부터 26일까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대해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분이니까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 믿는다"고 고인을 애도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명복을 빌며, 손명순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에게 위로를 보낸다"며 이같이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근래 언론 보도를 통해 병고에 시달린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는데,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데 대해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을 지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도중 전 전 대통령의 권력 기반이었던 하나회를 척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전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비자금 수사를 실시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두 사람을 구속시킨 바 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시절이었던 1993~1997년은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기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1만달러를 넘어섰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성공하는 등 국민들의 자긍심을 심어줬다.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은 대부분 저평가되고 있지만, 경제지표들만 놓고 봤을 때는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22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김영삼 정부 당시의 우리 경제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7.4%였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2%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도성장기로 분류할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집권 첫 해인 1993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6.3%였다. 하지만 성장률은 속도를 냈다. 1994년 8.8%, 1995년 8.9%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1996년 7.2%, 1997년 5.8% 등으로 집권 후반기에 성장률도 덩달아 떨어졌다. 경제가 성숙기에 들어서면서 김 전 대통령은 고도성장기를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서거한 가운데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정치인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다.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 등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상주로 나서 이명박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등 문상객을 맞았다. ◇상주가 된 상도동계=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빈소에 달려온 이는 김수한 김영삼기념사업회 이사장이었다. 상도동계 정치인으로 국회의장, 6선 의원을 역임한 그는 이날 오전 2시30분쯤 장례식장을 찾았다. 김 이사장은 "갑자기 부음을 듣고 달려왔다. 전혀 준비를 못했다"고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는 오전 8시30분 조문을 왔다. 김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을 통해 정치계에 입문했고, 상도동 김 전 대통령의 집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나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며 5일간 진행되는 조문기간 동안 상주 역할을 할 뜻을 밝혔다. 김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서거한 가운데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애도의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의 가장 큰 공은 우리 정치에서 군부독재를 끝낸 일"이라며 "민주화의 큰 산이었고, 문민정부를 통해 민주정부로 가는 길을 연 그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 민주주의 위기 속에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 그의 말을 되새깁니다"고 덧붙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트위터를 통해 "민주화, 문민, 개혁을 위한 88년의 삶. 큰 산, 큰 별이 졌습니다"며 "'대도무문' 고인이 우리에 남긴 큰 뜻, 남은 사람들이 무겁게 행동해 가겠습니다"고 밝혔다. 같은 당 정세균 의원은 페이스북에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의 대부로서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며 "강단 있는 결단력으로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척결 같은 쉽지 않은 개혁을 이루셨습니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우리경제는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22일 오전 10시 이 같은 내용으로 시작되는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담화문'을 읽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담화문에서 "시급한 외환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지원 체제를 활용하겠다"며 "이에 따르는 경제구조조정 부담도 능동적으로 감내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11월22일 모든 조간 신문의 1면 제목은 'IMF 구제금융 요청'이었다. 전날 밤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유동성 조정자금 2000억달러 이상을 IMF에 요청하기로 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담화문을 이를 국민들에게 직접 알리는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지난 30여년간 이룩해온 경제발전으로 세계가 부러하던 우리 경제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질책도 큰 것으로 알고 있다며"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나는 YS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오열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는 YS의 적자로 서고자 끊임없이 정치적 재기를 모색했다. 아버지의 정치적 기반인 새누리당과 길을 달리해 온 그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후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할 지 주목된다. 김현철씨는 문민정부에서 '소통령'이라 불릴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 여파로 문민정부 말 1997년 5월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전격 구속됐고 재판과 수감생활, 석방이 이어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0년 8월 최종 복권을 받고 미국 유학을 떠난 후 한동안 여의도 정가에서 모습을 감췄다가 2008년 10월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후 그는 "대통령의 아들이 아닌 김현철로 살아가겠다"며 정치에 대한 의지를 피력해왔다. 김 전 대통령 역시 자신이 아끼던 아들이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씨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살아있는 경남 거제에서 국회의원 선거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서거한 가운데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날 오전 10시53분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았다. 이 전 대통령은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장례식장을 향했고 20분 정도 빈소를 지켰다. 이 전 대통령은 빈소에서 "병원에 계실 때 완쾌해서 자주뵙자고 했었고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그렇게 못하셨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 전 대통령은 "아무튼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의 상징으로 민주화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며 "영부인은 못 뵙지만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상심이 크겠지만, 전국민이 애도하는 만큼 큰 위로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이 나가는 길은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가 함께 했다. 김 대표는 5일간 진행되는 조문기간 동안 상주 역할을 할 뜻을 밝혔던 바 있다. 이날 문상을 오던 길인 문재인 대표 등 새정치민주연합 인사들과 마주친 이 전 대통령은 웃는 얼굴로 악수를
'3김(三金) 시대'를 풍미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22일 오전 8시50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거동이 불편한 김 전 총리는 차에서 내려 부축을 받은 채 휠체어에 올라타 빈소로 향했다. 김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씨,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김수한 김영삼기념사업회 이사장이 김 전 총리를 맞았다. 김 전 총리는 "하여간 신뢰의 (상징인) 분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못할 것, 어려울 것, 다른사람 못하는 일을 하신 분"이라고 김 전 대통령을 평가했다. 또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라는 말이 참 떠오른다"며 허탈한 심경을 토로했다. 김 전 총리는 김현철씨에게 "운명하실 때 특별히 말씀하신 것은 없었는가"라고 물었고 김현씨는 "사실 한 동안 말씀하시기 좀 어려우셨다. 너무 급격하게 빨리 패혈증때문에 빨리 돌아가시는 바람에 저도 깜짝 놀랐다"고 답했다. 김 전 총리는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1항에 의거해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합니다" 1993년 8월12일 오전 7시 긴급 국무회의 직후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표한 연설문의 첫 문구다. 김 전 대통령은 발표문에서 "이 시각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진다"며 금융실명제 도입을 전격 발표했다. 당시 발표는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담당 공무원 10여명이 과천 시내 한 아파트에서 합숙작업을 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만큼 전격적으로 발표가 이뤄졌다. 발표 직후 대만민국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획기적인 변화였다. 부동산 실명제도 김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경제정책이다. 1995년의 일이다. 토지의 종합과세를 위해 도입된 부동산 실명제는 부동산 탈세와 투기 방지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당시 정부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가 '선진국'이었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서거했다. 향년 88세다. 빈소는 이날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다. 오병희 서울대병원 원장은 이날 오전 2시 병원 내 시계탑건물 1층 회의실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이같이 발표했다. 오 원장은 "서울대병원 측은 김 전 대통령은 과거부터 반복된 뇌졸중과 협심증, 폐렴 등으로 수차례 병원에 입원한 끝에 숨졌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13년 4월부터 10월까지 반신불수를 동반한 중증 뇌졸중과 폐렴으로 입원한 바 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낮 12시 고열을 동반한 호흡 곤란으로 입원한 뒤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이송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돼 끝내 서거했다"고 말했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허약한 전신 상태에서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이 겹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서울대병원 측은 전했다. 임종 시 의료진 외 아들 현철씨 등 가족 대부분이 자리했지만, 미망인인 손명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