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총 306 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한 관련 4대국(미국·중국·러시아·일본)의 '대화의 장'이 열렸다. 북핵 개발로 긴장감이 고조되던 13년 전 오늘(2003년 8월 27일) 중국 북경에서 6개국 외교 실무진들이 처음 머리를 맞댔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었지만 사흘간 열린 첫 회의를 포함, 4년간 6번의 회담은 북한 핵시설 폐쇄·불능화·핵사찰 수용 등 무력화 방안과 중유제공(100만톤) 등 경제적 지원을 동시에 제공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2·13 합의'의 토대가 됐다. 6자 회담은 북한이 2003년 1월 핵환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2차 북핵위기)하면서 진행됐다. 앞서 미국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개발하고 있다'는 CIA(미중앙정보국) 첩보를 확인하기 위해 북한에 특사를 파견했고 이를 부인하던 북한이 의혹을 시인하며 조약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이후 북한은 비핵화를 조건으로 남한 내 미군 완전철수와 미국의 북한 공격금지 보장, 미사일 수출 불가에 따른 손실 보장 등을
제1조.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할 권리를 가진다. 제6조. 모든 시민은 대표자를 통해 법 제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89년 8월26일. 프랑스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프랑스 인민 대표자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들을 명시하기로 결의했다. 프랑스 인권선언문(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서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입법 활동에 참여할 권리와 공무를 담당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평등의 권리는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여성의 권리는 제외됐다. 남성만의 평등, 남성만의 권리였다. 프랑스 혁명을 반겼던 여류작가 올랭프 드 구즈는 당시 상황에 분노를 느꼈다. 이전부터 흑인 노예제를 반대하는 희곡이나 여성의 이혼권을 옹호하는 글을 쓰며 시민활동가로서 활동해온 그였기에 실망감도 컸다.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남성이 가진 모든 권리를 가진다." 드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다 늙어서 이혼 소송을 낸 이유는 늙어도 헤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는데(그러지 못했다)…."(1999년 폭력과 외도를 일삼은 80대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낸 76세 부인의 인터뷰 중) 오랫동안 우리나라 가족 가치관의 핵심은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였다.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는 경제력 여부와 상관없이 집안 내에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은 당연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90년대엔 여권 신장 목소리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주의와 여성 권리라는 가치관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말 황혼이혼이 급증한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 이때까지는 전통적 가족 구조를 거부하는 이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당시 한 법학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의 권위주의는 이혼사유가 될 수 없다. 이혼사유가 된다면 한국 남자들은 모조리 이혼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시형 할머니도 마찬가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최종투표율 25.7%. 5년 전 오늘(2011년 8월 24일) 서울에서 진행된 주민투표는 개표기준(전체투표의 33.3%)을 채우지 못하면서 투표함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무상급식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쟁에 불을 지폈다. "저소득층 30%에 대한 선별적 무상급식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여당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주민투표를 앞두고 '시장직 사퇴'라는 배수의 진을 쳤다. 그는 반대표가 많거나 개표기준에 못 미치면 시장직을 물러나겠다고 했다. 오 시장은 결국 선거 이틀 뒤 시장직을 내려놨지만 '복지' 논란이 식지는 않았다. 투표 결과가 단순히 무상급식 문제를 결정하는 것을 넘어서 여당의 선택적 복지와 야당의 보편적 복지를 둘러싼 공방에 불을 지폈다. 오 전 시장은 사퇴 기자회견에서 "저의 사퇴를 계기로 과잉복지에 대한 토론이 더욱 치열하고 심도 있게 전개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에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을
1971년 8월23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 버스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버스에 타고 있던 이들은 주석궁으로 갔어야 할 24명의 북파공작원, ‘실미도 부대원’이었다. 45년 전 오늘, 그들은 왜 북한이 아닌 청와대로 향해야만 했을까. 이 일이 있기 약 3년전인 1968년 1월21일 북한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서울 세검정 고개에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1·21 사태'로 당시 우리 군경과의 교전으로 이들 중 30명이 사살됐다. 이날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라는 말로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왔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4월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동시에 북한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평양의 주석궁을 습격하기로 하고 31명의 전과자와 민간인을 모았다. 31명이라는 숫자는 박정희 암살을 시도한 북한특수부대의 침투조 인원수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렇게 1968년 4월, ‘2325 전대 209 파견대’가 만들어졌다. ‘684부대
독립협회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주요 경제적 후원자. 독립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 형조 참판과 총리대신을 지낸 조선의 '인재'. 그는 다름아닌 '나라팔아 먹은 인물'로 익숙한 이완용이다. 106년 전인 1910년 오늘(8월22일) 이완용은 대한제국과 일본의 '강제병합안'을 성사시켰다. 사실상 한국이 일본 '식민지'로 종속된 날이기도 하다. 이날을 두고 경술년 해에 일어나는 나라의 치욕이라는 뜻에서 '경술국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이날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을 가결시켰다. 명목은 번지르르했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그는 '대한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 한일병합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같은 날 오후 이완용은 한일병합과 관련한 전권을 위임받고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과 8개 조문에 합의했다. 이 조항은 일주일 뒤인 8월29일까지 극비로 부쳐졌다. 이완용은 끝까지 '대한제국을 위해 한일
36년 전 오늘(1980년 8월 2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대통령)로 추대된다. 혼란한 정국을 틈타 12·12사태와 5·17비상계엄령확대 등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그는 대통령에 추대된 지 11일 만에 취임했다. 국방부는 이날 오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통해 전두환 당시 육군 대장을 국가원수로 추대키로 결의한다. 지휘관회의는 계엄 시국에서 주요 권력 기구 중 하나였다. 앞서 5·18민주화운동의 계기가 된 비상계엄확대도 이 회의를 통해 추진됐다. 이날 회의에는 당시 주영복 국방부 장관과 유병현 합참의장을 비롯 3군 참모총장 등이 자리했다. 주 장관은 훈시를 통해 "국가 위난을 수습하고 새 시대 지도자로 부각된 전두환 대장을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결의한다"며 "불순세력의 조종 하에 민중봉기로 유도하려는 음모를 간파해 5·17조치를 시행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결정은 보름 전 육군 대장에 진급하면서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전 전 대통령의 뜻에 힘을 보탰다. 5일 전인 8월 1
45년 전 오늘(1971년 8월20일) 남북은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양측 적십자회는 이날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첫 접촉을 가졌다. 1970년 8월1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한 지 1년 만에 남북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8·15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에는 양측 체제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인도적 문제해결과 통일기반 조성 조치를 취하자'는 메시지가 담겼다.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1971년 광복절을 3일 앞둔 8월 12일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남북 이산가족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며 "1000만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전개하자"는 뜻을 북한에 전했다. 북한은 이틀 뒤 국영방송을 통해 수락의 뜻을 밝히며 "가족뿐 아니라 친척·친우까지 왕래토록 하자"는 역제안을 하며 적극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남북 간 합의가 이뤄지면서 이산가족 찾기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양측 적십자 대표는 그해 8월 20일 본 예
2003년 8월19일 한국의 최초 여성재판관이 탄생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사법연수원 동기(18기)인 전효숙 당시 특허법원 부장판사를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했다. 순천여고를 나온 전 전재판관은 1973년 이화여자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판사로서의 커리어는 순탄했다. 당시 전 전재판관과 함께 일한 동료 판사들은 그를 '보수적이지만 합리적으로 판결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대법원 재판연구관, 수원지법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특허법원 부장판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한 보수지에서는 "우리나라 판사 비율이 11%가 넘는 상황에서 여성 헌법재판관이 임명된 것을 환영한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지명되기 5개월 전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임명된 상황이었다. 여성 법조인의 법조계 '유리천장 깨뜨리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전 전재판관에게 시련이 찾아온 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惡)의 편이다." 2009년 6월11일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 특별연설을 위해 연단에 오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휠체어를 탄 모습이었지만 당장 건강을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약 한달 뒤, 김 전 대통령은 폐렴 증세로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다. 이전에도 몇 차례 같은 증세로 입원한 뒤 건강을 회복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점점 증세가 악화된 김 전 대통령은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며칠 후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일반 병실로 옮겨졌지만 바로 다음날 폐렴이 폐색전증으로 악화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건강 상태가 회복되고 나빠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2009년 8월18일,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진 김 전 대통령은 결국 눈을 감는다. 향년 83세. 이날 정오 무렵 잠깐 잠에서 깨어나 가족들과 눈빛을 맞춘 게 마지막 인사였다.
“8, 8, 8 이건 운명이에요!” 2008 베이징 올림픽 남자 400m 혼계영이 끝난 직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광판을 확인한 청년이 크게 포효했다.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은 미국의 수영 국가대표 선수 마이클 펠프스였다. 2008년 8월17일 펠프스가 세계 수영 역사를 새로 썼다. '단일 올림픽 8관왕', '8개 종목 신기록'.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단일 올림픽 8관왕'이라는 진기록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마크 스피츠(미국)가 세운 ‘단일 올림픽 7관왕’을 36년 만에 뛰어넘은 것이었다. 8개 종목에서 모두 신기록을 달성했다는 점은 메달의 가치를 높였다. 펠프스는 △남자 개인혼영 400m(4분03초84) △계영 400m(3분08초24) △자유형 200m(1분42초96) △접영 200m(1분52초03) △계영 800m(6분58초56) △개인혼영 200m(1분54초23) △혼계영 400m(3분29초34) 등 7개 종목에선 세계 신기록을, 접영 100m(50초58)에선 올
하룻밤의 허망한 꿈과 같았다. 40여개의 계열사, 재계 2위로 승승장구하던 기업이 한순간에 해체됐다. 무리한 경영확장과 부채가 원인이 됐다. 17년 전인 1999년 8월16일 김우중 전 회장의 대우그룹은 창업 31년만에 공중분해됐다. 김 전 회장은 대학을 마친 뒤 약 6년 동안의 회사원 생활을 접고 1967년 대우실업이란 조그마한 회사를 차린다. 그는 이 회사를 발판으로 사세를 확장시킨다. 그의 핵심 전략은 '수출 올인'과 인수합병(M&A)이었다. 대우그룹은 197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한다. 그는 회사 설립이후 10년간 제철화학, 자동차, 기계공업 등 여러 산업분야의 기업을 차례로 인수하며 회사를 늘려갔다. 1980년대에는 그가 만든 발판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수출사업을 시작한다. 김 전 회장은 냉전이 완화될 기미가 보이자 재빨리 동유럽국가를 중심으로 시장을 확대했다. 합작투자로 공장을 설립했고 당시 구소련 모스크바와 중국 북경에 지사를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