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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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육영수 여사)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대", "아이고, 엄마 모습이다."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얼마 남지 않은 선거 지원차 부산을 찾았다. 시장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박 위원장을 본 적지 않은 이들이 '육영수 여사'가 떠오른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일부는 실제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육영수 여사에 대해선 크게 이견이 없는 편이다. 퍼스트레이디이자 사회복지사로서 그의 활약은 최정상부터 최말단까지 각계각층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충북 옥천에서 지방 부호의 차녀로 태어난 육영수 여사는 서울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 박정희 당시 육군 소령과 만나 결혼한 그는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1963년 박 전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육영수 여사의 청와대 생활도 시작됐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그림자처럼 대통
"신문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25년 전 오늘(1991년 8월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했다. '일본군은 위안부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본 정부의 거짓 발표 앞에서 진실을 숨길 수 없었다. 김 할머니는 기자회견장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위안부의 만행은 잔학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대로 "그야말로 계집애가 이 꽉 물고 강간을 당하는...참혹한" 사건이었다. 발언의 사회적 충격도 컸다. 수만명의 꽃다운 한국 여성이 전쟁터로 끌려가 성노리개로 전락한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증언 이후 이듬해인 1992년 일본 가토 관방장관이 일본군의 위안부 관여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김영삼 정부는 진상 규명과 보상을 촉구했다. 이후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고노 담화(1993년)가 나왔다. 일본 교과서에는 위안부가 처음 기술됐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는
1955년 8월13일 오후 2시쯤 서울 적십자병원에 20대 청년이 입원했다. 두 시간여 동안 이어진 수술이 끝난 후 그는 남자 병실이 아닌 여자 병실로 옮겨졌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조기철씨였다. 수술을 무사히 마친 그는 보름간의 병원 생활을 끝낸 후 곧장 동화백화점 2층에 있는 미장원을 찾았다. 머리를 다듬고 난생 처음 파마도 했다. 조씨는 립스틱을 바른 빨간 입술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며 시종일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시 언론들은 그의 모습을 두고 "처녀다운 한줄기 수줍음을 감추고 있었다", "파마로 더욱 이뻐보이는 자기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몹시 만족한 듯 (웃었다)"고 전했다. 모여든 취재진들은 이런 그의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조군! 아니 조양!" 물론 당장 조씨를 부르는 호칭은 혼란스러웠다. 1950년대 당시 '성전환'은 해외토픽에서나 나올 법한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이슈였다. 성전환을 고민하는 사람은 정신·심리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판단하
6년 전 오늘(2010년 8월12일) 저녁 7시40분 한국 패션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별세한 것. 앙드레 김은 대장암과 폐렴 합병증으로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오다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거인이 남긴 굵직한 흔적들을 추억하며 그와 인연을 맺었던 많은 연예인들은 큰 슬픔에 빠졌고 국민들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1935년 8월24일 태어난 앙드레 김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1961년 디자이너 최경자가 세운 국제복장학원에 1기로 입학해 이듬해인 1962년 졸업했다. 같은 해 소공동에 '살롱 드 앙드레'를 열어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남성 패션디자이너가 됐다. '앙드레'라는 이름은 당시 주한 프랑스외교관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부르기 쉬운 외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서 붙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본명은 김봉남(金鳳男)이다. 앙드레 김은 1964년 당시 톱스타였던 영화배
서울을 출발해 부산-요코하마-상하이-홍콩-캘커타-카이로-로마-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까지. 1948년 대한민국 올림픽 선수단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한 경로다. 이들은 올림픽 후원권으로 마련된 적은 비용으로 올림픽을 치러야 했다. 20일 동안 기차와 배, 비행기를 갈아타며 런던으로 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메달을 따기는커녕 경기를 제대로 치르기도 어려울 것 같은 여정. 그러나 68년 전 오늘(1948년 8월11일) 30세의 역사(力士) 김성집은 태극기를 달고 '건국 후 첫 올림픽 메달'을 들어올렸다. 배와 비행기 안에서도 역기를 놓지 않았던 집념으로 이룬 쾌거였다. 김성집은 역도 미들급에서 추상(현재는 폐지) 122.5㎏으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인상 112.5㎏, 용상 145㎏을 더해 합계 380㎏으로 미국의 프랭크 스펠만과 피터 조지에 이어 동메달을 획득했다. 대한민국의 올림픽 첫 메달은 그의 12년 묵은 한을 푸는 메달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절 압도적인 실
2008년 8월10일.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전이 열린 베이징 워터큐브에서 3번 레인의 선수가 가장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다. 전광판에 나타난 자신의 기록을 확인한 선수는 포효했다. 한국 수영의 역사를 새로 쓴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주인공은 아시아 선수 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박태환. 박태환은 전날 열린 남자 자유형 400m 예선 3조 경기에서 3분43초35로 2위를 기록했다. 개인 최고기록이자 한국 신기록이었지만 3분43초32로 아시아 신기록을 수립한 중국의 장린이 조금 더 빨랐다. 결승전은 달랐다. 박태환은 3분41초86의 기록으로 아시아 신기록과 동시에 80년 한국 수영의 역사상 첫 금메달을 조국에 안겼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어깨가 많이 무거웠지만 국민 여러분께서 응원해주신 덕분에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자유형 200m에서는 중국 쑨양에 이어 은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수영 불모지에서 자란 박태환이 세계 정상에 오르자 대
1945년 5월 유럽의 전화(戰火)가 꺼졌다. 이탈리아에 이어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면서다. 삼국동맹에 참가한 나라는 일본만 남았다. 일본의 신중한 강화파 관료들은 전쟁 종결 얘기를 꺼냈다. 육군 강경파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미국, 중국, 영국 3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과 '전면적인 멸망' 사이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이른바 포츠담 선언의 내용이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왕제 유지를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지배층은 일왕제가 폐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강화파든 강경파든 마찬가지였다. 스즈키 수상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했다. 일본 국민에게는 승리할 때까지 싸운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원폭 투하로 반격했다. 8월6일 오전 8시15분. 섬광과 함께 거대한 버섯구름이 치솟았다. B-29 폭격기가 핵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뜨린 직후였다. 사람과 건물이 증발했다. 도시는 잿더미로 변했다.
“기정아, 4분 전에 ‘자바라’(우승후보로 꼽혔던 아르헨티나 선수)가 달아났어.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그놈을 따라잡아야 해!” 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 반환점을 돌고 있던 손기정 귀에 한국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코치이자 선배였던 권태하였다. 손기정은 4분 거리를 가늠해 힘껏 달렸다. 비스마르크 언덕에 도달하자 지쳐 보이는 자바라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기정은 가볍게 그를 제쳤다. 결승점인 베를린올림픽스타디움에 들어선 손기정은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렸다. 결승 테이프를 끊기 전 100m를 11초에 통과할 정도였다. 2시간29분19초2. 처음으로 2시간30분대 벽을 깬 세계 최고기록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은 환호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의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동메달을 딴 남승룡도 마찬가지였다. 손기정은 가슴팍에 그려진 일장기를 우승으로 받은 월계수 묘목으로 가렸다. 기테이 손(Kitei Son).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1992년 8월8일 바르셀로나 상호루 체육관. 마침내 벌어진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이었다. 이제 스무살 갓넘긴 앳된 얼굴의 선수 7명의 비장한 표정을 하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들보다 평균신장이 7cm나 큰 노르웨이 팀과 마지막 승부를 벌여야 했다. 경기는 생각보다도 더 싱거왔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노르웨이 선수들의 철벽 수비를 특유의 스피드와 팀워크로 극복하고 28대21 대승을 거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은 두번째 여자 핸드볼 금메달이었다. 사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시작된 후 한국 여자 핸드볼 팀의 우승은 쉽게 점쳐졌다. 올림픽 예선전과 결승전 등을 통틀어 한국팀이 득점한 점수는 108점. 선수 1명당 평균 득점이 무려 27점이었다. 상대팀을 압도한 경기를 파죽지세로 이어갔다. 결승전에서 만난 노르웨이팀도 이미 예선전에서 11점차로 가볍게 누른 팀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승리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팀 구성부터가 문제였다. 1988년 올림픽 우승에 갑자기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조선)을 소재로 지은 시 '동방의 등불'로 우리에게 친숙한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75년 전 오늘(1941년 8월7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였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간디와 함께 인도의 아버지로 손꼽히는 그는 인도뿐 아니라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폭압에 간디와 함께 인도의 독립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간디는 그를 '위대한스승'이라며 존경을 표했다. 1861년 인도 콜카타 대부호(브라만 계급)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정규교육에는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학업을 포기하던 11살 즈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6살에 첫 시집 '들꽃'을 발표했다. 부모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고 다섯째 형에게 길러졌지만 피는 못 속였다. 그의 아버지
'탑승객 228명 사망, 26명 부상.' 19년 전 오늘(1997년 8월6일) 대한민국 김포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미국 괌 아가나 국제공항으로 향한 대한항공 801편(보잉 747)이 착륙에 실패하며 참사가 벌어졌다. 승객 237명과 승무원 17명을 포함 254명 중 생존자는 단 26명. 생존자도 모두 화상 등의 부상을 입었다. 이날 오후 8시22분 김포에서 출발한 항공기는 괌까지 무사히 비행을 하고 착륙을 시도 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 당시 태풍의 영향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관제탑의 항공기 착륙 유도장치가 고장 난 악조건이었다. 충돌 7분 전, 갑자기 유도장치 신호(허위신호)가 감지됐고 조종사는 혼란에 빠졌다. 조종사는 유도장치를 그대로 따르기 어렵다고 판단,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착륙을 결정했다. 하강 과정에서 '대지와 가깝다'는 경보장치도 울렸지만 조종사는 착륙을 진행했다. 사고 발생 2~3초 전에야 위험을 감지하고 방향을 틀었지만 떨어지는 항공기는 결국 언덕에 충돌
"5, 4, 3, 2, 1" 남산에 위치한 길이 20미터, 지상 5층 높이의 하얀색 건물이 단 5초 만에 검은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20여년 간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이름값'이 무색해졌다. 20년 전 오늘(1996년 8월4일) 서울 남산에 위치했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제1별관 건물이 철거됐다. 안기부 건물 해체작업은 서울시가 정도 600년을 맞아 추진한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에 따른 것이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인 제5공화국 때 만들어진 안기부는 민중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남산에서 왔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 박정희 정부 때 맹위를 떨친 '중앙정보부'가 그 전신이다. 중앙정보부가 대북 첩보활동보다 학생 운동권, 반정권 및 여성 운동 등에 가담한 인사들을 감시하고 이들의 인권을 탄압한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이미지 쇄신을 위해 이름을 안기부로 변경해 조직을 개편했다. 안기부에 대한 사람들의 원성도 만만치 않았다. 정부의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