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10월19일. 서울 여의도광장에 승용차 한 대가 돌진해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들이받았다. 어린이 2명이 숨지고 21명이 다쳤다. 범인은 반복된 실직과 세상에 대한 원망을 범행 이유로 내세운 20대 남성이었다. 그는 1997년 12월30일 사형에 처해졌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날이었다.
아이들 놀던 광장에 돌진…차 멈추자 여중생 인질극

당시 여의도광장은 지금의 여의도공원과 달리 시민들이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즐기던 넓은 광장이었다
20대이던 김용제는 이런 광장에 차를 몰고 들어와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시민들을 들이받으며 광장을 가로지르던 차는 자전거 보관시설과 충돌한 뒤에야 멈췄다.
차에서 내린 김용제는 흉기를 들고 달아났다. 시민들이 쫓아오자 자전거를 타고 놀던 여중생을 붙잡아 인질극까지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민들에게 제압된 그는 경찰에 넘겨졌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광장에 놀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다. 숨진 6살 어린이도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다 죽여버리고 싶어서"…무고한 시민들에게 돌린 분노

김용제는 검거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생각 없다"며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어차피 죽으려고 했으니까 그냥 무조건 밀어붙였다"고 했다.
그가 내세운 범행 이유는 반복된 실직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었다. 김용제는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었고 어머니는 시각장애가 있었다. 김용제 역시 선천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았다.
성인이 된 그는 중국음식점 배달원과 선원, 공장 노동자 등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지만 오래 일하지 못했다. 김용제는 경찰 조사에서 시력이 나쁘다는 이유로 양말공장에서 해고된 뒤 부산의 신발공장에 취직했지만, 그곳에서도 쫓겨나 범행 일주일 전 서울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그는 "이왕 죽을 바에야 세상에 복수하고 죽자는 생각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겪은 좌절과 분노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시민들에게 돌린 것이다.
범행을 준비한 정황도 드러났다. 김용제는 사건 사흘 전 서울 화곡동 주택가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를 훔쳤다. 소지한 수첩에서는 범행 전날 형에게 쓴 유서도 발견됐다.
손자 잃은 할머니의 선처 호소…끝내 집행된 사형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용제는 1991년 11월29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어린이들을 숨지게 한 범행과 인명을 경시하는 태도, 재범 우려 등을 들어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듬해 3월20일 항소심에서도 사형이 유지됐다. 수감 중이던 김용제를 찾아간 유족도 있었다. 숨진 6살 아이의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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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시력이 나쁜 김용제에게 안경을 맞춰주고 겨울에는 이불을 넣어주며 신앙을 가질 것을 권했다. 1992년 6월19일 서울구치소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열린 김용제의 세례식에도 참석해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시 할머니는 취재진에게 "김용제가 사형당한다고 이런 범죄가 없어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할머니의 선처 호소에도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1992년 8월1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이후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김용제는 1997년 12월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국에서는 이날을 끝으로 사형 집행이 중단됐다. 김용제는 국내에서 실제 형이 집행된 마지막 사형수 23명 중 한 명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