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문을 닫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77일간의 쌍용차 공장 점거 파업이 막을 내렸다. 모두가 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노사 양측의 막판 양보가 극적 반전을 가져 왔다. 문제는 앞으로다. 일단 당장 회사를 굴리는 데 필요한 급전을 긴급 수혈하는 게 급선무이고 궁극적으로는 새 주인을 만나 시장에서 평가받는 경쟁력 있는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게 생존의 필요충분조건일 것이다.
‘회사가 휴업을 발표하자 노동자들이 즉시 파업에 들어가 공장을 점거하고 150여명의 감독과 작업반장을 도장실로 몰아넣었다. 노동자들은 휘발유통을 휘두르며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했다. 회사측이 백기를 들었다’ 자동차회사에서 벌어진 장면이지만 무대는 우리나라가 아니다. 1963년 아르헨티나 자동차 업체 이카(IKA)에서 있었던 분규의 현장이다.
이카는 자동차 산업을 적극 키우려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어 1955년 출범의 돛을 올렸다. 높은 관세로 수입차를 차별하고 10년 간 면세 혜택이 주어지는 등 정책적 지원이 만만치 않았다. 회사를 망가뜨린 불씨는 극렬한 분규에서 지펴졌다. 군대까지 동원될 정도의 분규로 결국 회사가 만신창이가 되면서 1970년 르노에게 인수돼 이카의 국적이 바뀌어 버린다.
쌍용차와 이카. 시대적 상황도 다르고 결말도 다르지만 던져주는 교훈은 같은 맥락이다. 상생의 길에서 탈선한 적대적 노사관계가 일터 자체의 숨통을 죄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절한 타협점에서 자제력이 발동되지 못한 채 일단 갈 데까지 가보는 ‘결투식 노사관계’는 상처뿐인 여진만을 남기는 것이다.
한 때 세계시장을 주름잡다 생존의 절벽에서 겨우 ‘안락사’를 면한 미국 자동차 업계는 어떤가? 글로벌 금융위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됐겠지만 수십 년간 곪아온 환부가 이번에 터진 데 불과할 뿐이다. 미국은 질병의 원인도 그 처방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외면하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는 못 막는’ 상황을 자초했다.
미국의 명문대학 MIT는 경제학자, 과학자, 엔지니어 등을 망라한 드림팀을 구성해 2년에 걸친 연구 분석 끝에 1986년 ‘Made in America'라는 제목의 미국 산업보고서를 출간했다. 이 보고서는 당시 미국 자동차업계의 현 위치를 일본과 유럽, 한국 같은 신흥공업국에 협공당하는 신세로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이 소형차로 옮겨가는 것을 읽지 못한 근시안적 경영과 기업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하는 노조 등 내부적 문제로 미국차가 경쟁력을 잃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서로 믿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는 적대적 노사관계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노사관계의 혁신을 촉구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미국 자동차산업의 문제점은 화석화된 20여 년 전의 현상이 아니라 최근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던 고질병이었다.
미국 차 업계와 아르헨티나의 이카 모두 회사의 성공을 직원, 나아가 노조의 성공으로 받아들이는 협조적 노사관계의 틀을 만들어 내지 못해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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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에 나오는 버틀란트 함정(Bertrand Trap)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주로 기업들끼리의 죽기살기식의 무모한 가격경쟁을 뜻하는 것이지만 공생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공멸의 외길로 치닫는 어리석은 의사결정의 폐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93년과 1994년 중남미 코스타리카에서는 필립 모리스와 B.A.T간의 담배전쟁이 벌어졌다. 필립모리스가 먼저 담배 값을 무려 40% 내린 것을 시발로 두 회사가 장군멍군식의 가격 인하 경쟁을 벌였다. 결과는 필립 모리스는 8백만 달러, 비용을 밑도는 수준까지 값을 내린 B.A.T는 2천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두 회사 모두 시장 점유율을 늘리지는 못한 채 막대한 피해만을 본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 같은 사례는 생산적 노사 관계의 기초를 닦지 못한 한국 자동차 산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쌍용차 사태도 사태지만 연례 행사처럼 겪고 있는 분규의 몸살. 상호 윈-윈(win-win)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상호 루즈-루즈(lose-lose)의 ‘버트란드 함정’에 빠져드는 잘못의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
경제 위기의 끝자락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미국 차 업계의 전열 재정비, 하이브리드 카를 앞세운 일본의 공세, 중국의 세력 확장, 유럽의 반격 등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는 중원을 잡기 위한 새로운 전운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국가들은 발목을 잡아 온의 분규의 부담에서 벗어났거나 상대적으로 문제가 덜 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
먼 훗날 한국 차 업계가 지혜롭게 협조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해 위기이후 세계시장에서 비상했다는 ‘Made in Korea'보고서가 나오길 기원해본다. 홀로 근시안적, 전투적 노사관계의 볼모가 되어 아르헨티나 이카의 사례에 몇 가지 쇠락의 사례를 더하는 불명예가 역사의 교훈으로 남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