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희망' 엘피다의 몰락에서 배운다

일본의 '희망' 엘피다의 몰락에서 배운다

오동희 기자
2012.03.01 17:10

조직 내부 결속, 강력한 리더십에 장비, 부품, 소재 경쟁력 키워야

일본 반도체의 희망 엘피다의 법정관리 신청에 대해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다양한 분석들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에 밀려 세계 3위로 내려앉은 일본에 대해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와 함께 일본 제조업의 몰락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히노마루' 반도체의 희망, 엘피다 몰락=엘피다는 그리스어로 희망을 뜻하는 '엘피스'에서 따왔다. 1980년대 세계 D램 시장을 호령했던 일본이 1992년부터 한국 기업들에 밀리면서 10여개 기업들이 줄어들어 결국 1개의 D램 업체만 남게 됐고, 그 절박함이 '희망'이라는 어원의 '엘피다'를 만들어냈다.

1999년 12월 NEC와 히타치는 'NEC 히타치 메모리 주식회사'를 합작했고, 2000년 4월 회사명을 희망을 뜻하는 '엘피다'로 바꿨다. 이후 기존 공장 외에 2005년 히로시마 공장을 설립하고, 웨이퍼 프로브 테스트 전문회사인 테라프로브(주), D램용 백엔드 프로세스 업체인 아키타 엘피다메모리, 프런트 엔드 프로세스 합작사인 렉스칩을 각각 설립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내 언론들은 과거 일본의 영광을 재현하는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의 부활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PC 시장의 성장에 기대를 걸고 2007년 대규모 투자에 나섰으나 2008년 가을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침체로 2009년 3월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몰락이 시작됐다.

2009년 6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산업활력 재생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1호 기업으로 지원했지만 일본 대지진, 엔화강세와 D램 가격 하락, 2011년 태국의 대홍수로 인한 HDD 공급 부족에 따른 PC 제조감소로 3중고, 4중고를 겪었다. 결국 지난 27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도쿄지방법원에 회사갱생법(법정관리) 적용을 신청했다.

◇일본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이유=전세계 반도체 제조 생산 기술경쟁력을 순위로 매기면 미국, 일본, 네덜란드, 한국 순이다. 장치산업인 반도체의 경우 장비의 경쟁력이 곧 기술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세계 1위는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리얼(2010년 기준 60억1700만달러), 2위는 네덜란드 ASML, 3위는 일본 도쿄일렉트릭(TEL)이다. 네덜란드는 경쟁력 있는 장비업체가 ASML이 거의 유일하지만, 일본의 경우 TEL, DNS, 캐논, 니콘 등 다수의 장비업체들이 세계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현재 미국에 이어 2위의 기술경쟁력을 갖고 있다.

이런 장비기술력을 갖춘 일본의 D램 제조업체들이 경쟁력을 잃은 이유는 세계 시장이나 주변 환경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측면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는 평가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NEC와 히타치의 결합으로 양쪽 엔지니어간 기술다툼이 심했고, 이를 중재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부족한 게 오늘날 엘피다의 미래를 결정지었다"고 말한다.

내부갈등 속에 기술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엔화 강세로 가격 경쟁력마저 뒤떨어진데다, 미래 시장을 조망하고 책임지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오너십이 부족한 게 쇠락의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1999년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방한 후 가장 큰 고민거리도 기술력 향상 문제보다 조직문화의 융합이었다. 하이닉스 내 현대쪽 노조와 LG 쪽 노조가 화합을 통해 경영진과 힘을 합쳐 회생에 노력을 기울인 점이 하이닉스 부활의 원동력이 됐다.

업계 관계자는 "SK에 인수된 하이닉스는 과거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결합에 더해 'SK'의 조직문화를 융합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측면에서 SK가 최태원 회장 외에는 다른 '점령군'을 하이닉스에 무리하게 보내지 않은 게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죽지 않을 일본 반도체=일각에서는 엘피다가 법정관리를 통해 회생되기보다 독일 키몬다와 같이 조용히 D램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승우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엘피다의 경우 하이닉스(워크아웃성공 사례)보다는 키몬다 케이스(자산매각 후 퇴출)의 경로를 걷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하이닉스가 될지 키몬다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키몬다처럼 엘피다의 손을 쉽게 놓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단순히 D램 소자업체 1개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장비, 부품, 소재 등 반도체 산업 전체의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D램의 경우 일반용 외에 군수용으로 대거 공급되고 있어 일본이 엘피다의 '산소호흡기'를 쉽게 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계의 고위 관계자는 "엘피다는 일본 내에서는 계륵"이라며 "갖고 있기도 부담스럽지만 그냥 버리지도 못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결국 법정관리 하에서 자국내 도시바나 미국 마이크론, 대만 난야 등과의 협력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게 일본 정부의 입장일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D램 점유율을 합치면 65%지만 이는 일본 기업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도 있다.

한 때 일본 극우파 내에서는 '삼성이나 하이닉스에 반도체 장비를 공급하지 말라'는 얘기까지 돌았다. 이들의 장비 공급이 없으면 삼성이나 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장비 외에도 핵심 소재인 웨이퍼는 신에츠나 섬코 등 일본 업체가 전세계 시장 1,2 위로 과점체제다. 국내 기업들이 장비 및 재료, 부품 등의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이유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기자의 생명은 현장에 있다' 머니투데이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입니다. 추천도서 John Rawls의 'A Theory of Justice'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