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한 블랙컨슈머의 한끼 식사 영수증

"지난달 고객 A씨의 부친 칠순잔치 비용을 회사에서 몽땅 계산한 일이 있었어요. 직원에게 1000만원 한도 법인카드를 쥐어 보냈더니 돈이 부족하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할 수 없이 400만원을 더 보냈습니다."
최근 만난 한 금융회사 임원이 "블랙컨슈머에게 제대로 당했다"며 피해사례를 털어놨다. A씨는 대출 이자 등을 연체한 상태였는데 신입사원이 상담을 하다 실수한 것이 화근이 됐다. A씨의 대출 연체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부인이 은행으로 찾아와 "얼마를 빌렸는지 알아야 대신 갚을 것 아니냐"며 대출 정보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경험이 부족했던 신입사원이 대출 정보를 부인에게 알려줬는데 그때부터 A씨의 활동(?)이 본격화됐다. A씨는 "내 정보가 유출됐다"며 청와대, 금융감독원, 소비자보호원 등 수십 곳에 민원을 넣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파장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이 금융회사는 A씨를 찾아가 합의를 봤는데 이때 제시한 조건이 아버지 칠순잔치 식사비용을 지원해달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칠순장치 장소였다. 돈이 없어서 분식점 배달일을 하고, 생활비를 제하면 한 달에 30만원도 갚기 어렵다던 A씨. 하지만 부친의 칠순잔치는 강남 최고급 호텔에서 열었다. 이날 A씨는 손님들을 불러 값비싼 코스요리를 비롯해 최고급 와인, 샴페인 수십 병을 대접했다.
이 금융회사 임원은 "나도 몇년 전에 부모님 칠순잔치 했는데 식사에 선물, 여행까지 다 해도 훨씬 적게 들었다"며 "1400만원짜리 한 끼 식사 영수증에 직원들 모두가 놀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블랙컨슈머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건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최근엔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금융권 뿐 아니라 제조, 유통 등 전 산업계에서 흔히 나타나고 있다. 블랙컨슈머에게 시달리다가 회사에 사표를 내거나 정신과 상담을 받는 우울증 직원들도 매년 급증하고 있다.
블랙컨슈머에 제동을 걸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높지만 관련 법 제정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소비자단체 반발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더 늦기 전에 본질을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당장은 기업이 블랙컨슈머를 대응하지만 결국 모든 비용이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