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만 해도 맥주 전문점에서나 즐길 수 있던 수제맥주는 주세 제도의 개편과 일본 맥주 소비 감소를 계기로 동네 편의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소맥 용도로는 국산 맥주, 편의점에선 수입 맥주를 주로 마시던 소비자들의 선택지가 훨씬 다양해졌다. 생소하게 여겼던 IPA, 페일에일, 위트에일 등의 맥주 종류를 이제는 골라가며 즐기는 사람도 제법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을 보면 수제맥주는 어엿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아가는 듯하다.
수제맥주 산업이 연간 1500억원 이상의 시장으로 빠른 성장을 이뤘지만 정작 업계 종사자들이나 수제맥주사들은 대부분 과거보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매장에서 주로 맥주를 판매하던 소규모 수제맥주업체들이 코로나19(COVID-19)에 따른 영업제한으로 판로를 잃고 존폐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해엔 11개월 동안 영업시간이나 집합 인원에 제약을 받았다. 더 심각한 것은 맥주 제조를 겸하는 수제맥주업체의 특성상 소상공인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영업손실 보상조차 거의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판매하는 수제맥주회사들은 상황이 낫지만 150여개 수제맥주업체 중 편의점 납품이 가능한 곳은 10여개에 남짓하다.
정부가 큰 설비투자 없이도 캔맥주를 판매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명분으로 주류의 위탁생산(OEM)을 허용했으나 이 조치도 업계에 긍정적으로만 작용하고 있지 않다. 수제맥주 유통에 있어 절대적 지위를 가진 편의점들이 수제맥주회사 고유 브랜드보다는 협업 제품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제품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에 밀가루, 치킨, 치약, 껌, 배달앱, 라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한 수제맥주가 출시됐지만 맥주 자체의 품질이나 차별화보다는 소비자의 이목을 끌기 위한 화제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왔다. 원재료의 지속적 단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4캔 1만원이라는 틀에 오랫동안 갇혀 다양하고 품질 좋은 맥주를 만들기 어려웠던 환경에서 협업과 디자인이 더 중요한 요소가 돼버린 것이다. 게다가 화제성 제품들은 짧은 시간 소비된 후 또 다른 상품으로 대체되고 만다.
힘들게 싹을 틔운 수제맥주업계가 다시 움츠러들고 수십 년간 이어졌던 획일화된 맥주 문화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수제맥주 산업의 미래가 어디로 가는지 냉정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정책방향과 소비자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
정부는 코로나19로 초토화된 영세 수제맥주 제조업체에 대한 온라인판매를 허용하고 과감한 세제 지원을 통해 산업의 뿌리가 고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소비자는 협업 제품과 더불어 맥주 자체의 품질과 다양성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 그것이 수제맥주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고 소비자들이 더 다양하고 품질 좋은 맥주를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방법일거라 믿는다. 새해를 맞으며 옳은 방향 설정으로 K-푸드와 함께 세계로 뻗어나갈 K-비어의 토대가 마련되길 기원해본다.
박정진 한국수제맥주협회장·카브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