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출발하는 건 무리겠지? 집에 가는 길에 '통금'(야간통행금지)'에 걸리면 골치 아프잖아.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가야겠다." 어린시절 온 가족이 아버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자고 온 적이 있다. 원래는 저녁식사 후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웃고 떠드는 사이 밤 11시가 지나자 귀가를 포기한 것이다.
유치원 입학 전 일인데도 그날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나름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다. "(우리)집에 가자"는 딸의 줄기찬 성화에 어머니는 단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밤 12시 넘어서 길거리 돌아다니면 경찰 아저씨한테 잡혀 간다."
야간통행금지는 자정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통행을 금지했던 제도로 통금으로 불렸다. 통금은 치안 및 질서유지 명목으로 1945년 시작돼 1982년까지 무려 36년간이나 실시됐다. 통금을 경험하지 못한 1980년대 이후 세대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매일 밤 자정이 되면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통금이 풀리기 전에 거리에 나섰다가 경찰이나 방범대원에게 잡히면 파출소 유치장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최근 정부의 기업 관련 정책을 보면 통금 등 각종 규제가 난무했던 1980년대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자유시장경제 구조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입을 일삼고 있어서다.
프랜차이즈 신규 출점을 금지하는가하면, 계열사간 거래는 모두 일감 몰아주기로 의심했다. 급기야 지난 13일에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한 부당 단가 근절대책'을 발표, 5대 TV홈쇼핑의 방송 편성시간까지 참견하고 나섰다. 내년부터 프라임 시간(평일 기준 오전.오후 8∼11시)에 중소기업 편성비중을 3%포인트(55%→58%, 월 9시간 추가) 높이라고 결정한 것이다. 수수료 무료 판매방송도 올해 80개에서 2015년까지 120개로 늘려야 한다.
방송 편성은 홈쇼핑 업체들이 소비자에게 다른 채널과 다른 특장점을 알리고 매출을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 무기다. 하지만 정부는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표에 쫓겨 홈쇼핑 업계의 출혈은 나몰라라 하고 있다. 한 홈쇼핑업체 사장은 "홈앤쇼핑은 이미 중소기업 편성비율이 80%를 넘어섰고 나머지 4개 홈쇼핑도 절반 이상인데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전 세계에서 정부가 홈쇼핑 방송 편성시간까지 일일이 규제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중소기업이 성장하려면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수정하는 등 공정거래 질서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대한민국 대표 기업들의 경쟁력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내수 시장에서 버림받은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이 가능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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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기업을 부당한 '갑', 중소기업을 힘없는 '을'로 규정해 정책을 펴는 것은 위험하다. 당장은 불이익 받을 것이 두려워 정부 정책을 따를 수는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투자 대신 재산 증식, 국내시장 탈출로 눈을 돌리는 순간 한국 경제는 성장 동력을 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