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참으로 바쁜 사회에 살고 있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둘째치고 눈만 뜨면 달라져 있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늘 분주하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 동력 중 하나가 서구 외래문화 도입이다. 우리는 다양한 서구문물을 가능한 한 빨리 받아들여 그것을 따라가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이처럼 선진국을 모방해서 그들처럼 되려는 일에 너무나 골몰한 나머지 새로운 것을 들여오는 우리의 속도는 가히 엄청나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에 살면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곁눈질을 하다가는 질주하는 열차에서 낙오하는 신세가 된다. 사태가 이렇다보니 우리 사회는 자신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도 없다. 이러한 경우의 전형이 영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맹목적 숭배와 과용이다. 세계화 시대에 영어가 중요하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 가지고도 이 사회는 영어가 난무하는 사회로 급변한다.
요즘 대중가요를 보면 영어가사가 없는 노래를 찾기 어렵다. 처음에는 명사 한두 개로 시작해서 짧은 어구나 문장으로 나아가더니 어느 덧 여러 개의 긴 문장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위센터' '위스타트' '하이 서울' 이 모든 문구가 우리 사회 공직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한글을 가장 과학적인 언어라고 자랑하면서도 '텔레그램 토크'(Telegram Talk)라는 문구를 버젓이 전시해놓고 뉴스를 진행하는 사회, '이노베이션'이라는 말이 광고에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왜 이것이 문제인가? 왜냐하면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쓰는 말이 사람의 사고를 지배한다. 생각은 말을 통해 이루어지고, 말은 그 문화의 특성을 반영한다. 그래서 말이란 주어진 사태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정을 중시하지만, 특히 미국사회에서는 대인관계를 비용과 이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대인관계를 영어로 사고하면서 미국사람처럼 생각하면 그들의 시각이 곧 우리의 대인관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젊은이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어로 된 학문을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나간다. 교육부는 한 손에는 평가라는 무기로 위협하고 다른 한 손에는 재정적 지원이라는 미끼로 유혹하면서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우리말로 소통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학문을 무차별적으로 영어로 가르치도록 강요한다. 이 속에 숨어 있는 뼈아픈 진실은 '우리 사회는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인재의 기준도 없을 뿐더러 그러한 인재를 스스로 양성할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더욱 비참한 일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비하하고 부정하는 심리적 상태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우리말보다는 영어가 우월하다는 생각,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배워야 제대로 공부한다는 생각 속에서, 한국에서 한국말로 공부하는 대다수 우리가 자신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타인을 인정하고 자랑스러워 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뿐인가. 우리는 아무리 해도 원어민처럼 영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거니와 그들과 똑같이 사고할 수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이러한 비극적 과정의 결말은 나와 타인에 대한 부정과 폄훼일 뿐이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대부분 사람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1차원적 사회는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에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곳이다. 그러한 사회에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어떤 사회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사고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때 가능하다. 얼마 전 한글날, 우리말을 칭송하는 기념식을 방송하는 뉴스시간에도 여지없이 영어는 무차별적으로 등장했다. 이것을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우리 사회는 심리적으로 좀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