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발표된 삼성그룹의 여성임원 인사에 눈길이 갔다. 1994년 여성 공개채용 절차를 거쳐 삼성에 입사한 신입사원 중 임원승진자가 3명 나왔기 때문이다. 1994년은 내가 처음 언론사 기자로 첫 발을 내디딘 해이기도 하다. 딱 20년 전이다.
이번 삼성 여성임원 인사 소식을 들으면서 문득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미생의 '안영이'다. 그리고 든 생각, '안영이는 삼성 여성공채 신입처럼 20년 후쯤인 지금, 임원이 돼있을까'.
안영이는 신입사원 중 '홍일점'인데다 동료 남성 신입사원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독자들이 안영이를 주목하는 건 능력 때문이 아니다. 조직에서 받는 '구박' 때문이다.
20세기 종합상사(삼성으로 치자면 삼성물산)를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에서 안영이는 "또각거리는 구둣소리가 귀에 거슬린다"거나 "내가 회의실에서까지 분 냄새를 맡아야겠어?"라는 남자부장의 언어폭력을 듣고 산다. "그래봐야 여자인 주제"라는 멸시다.
취재를 하면서 현장에서 만나는 여성임원의 대다수는 '남자처럼' 살고 있는 모습이다. '미생'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여성인물 재무부장이 좋은 예다. 별명은 '미소부장'이지만 뛰어난 업무역량에 엄청난 카리스마로 조직을 휘어잡으며 '보스' 기질을 보인다. 남성 위주 조직문화에서, 수십 배, 수백 배 더 많은 남성 부하와 동료와 상사 사이에서 그들처럼 혹은 그들보다 더 독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더 현실적이다.
그런데 그들 중 적지 않은 임원이 한결같이 말하는 게 있다. "초임 남성임원들이 '남성임원의 리더십교육'을 받을 리 없죠. 우리는 한 번쯤 '여성임원의 리더십교육'을 받지요. 임원이 되고나서 처음 인식하게 되는 일이 내가 여성이구나예요."
빈정거림과 멸시의 단어였던 '여성'이 갑자기 '여성 특유의' '여성 고유의'라는 수식어로 바뀐다는 얘기다.
임원급으로 성공했지만 여성들이라고 다 잘 할 리 없다. 올해 출판계의 안타까운 소식 중 하나는 책 잘 만들고 책 잘 파는 능력자로 평가받던 한 여성 CEO의 회사 매각 사건이다. 회사 내에서 벌어진 성추행과 관련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구성원(주로 여성)과 갈등하다 뭇매를 맞았고, 결국 극단적인 해결방식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립교향악단도 시끄럽다. 서울시향 여성 CEO는 2013년 초 부임 당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지금은 여느 남성 CEO보다 더 심한 폭언을 쏟아 붓는 나쁜 모습만 강조된다. 그뿐인가. 올해 어쩌면 '최악의 여성임원'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를 '오너의 딸'도 등장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판단력'과 '갑질'을 '국제무대'에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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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 안영이도 임원이 됐다 해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리라 보장할 수 없다. 안영이가 임원이 됐다면 본인의 능력만으로 된 일이 아니다. '분냄새'를 운운하는 잘못된 상사를 솎아내고 안영이가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이끌고 키운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임원이 된 그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그 역시 타고난 개인기나 '고유의' 여성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직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임원들이야말로 '여성 리더십'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훌륭한 예비 여성임원을 발굴하고 키우는 책임은 아직도 조직 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들에게 있으니 말이다.
여성 '특유'나 '고유'란 단어 함부로 쓰지 말자. 실망은 차치하더라도 아직은 여성성을 버리고 사는 '위험한 여성'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데서나 여성성 운운하다 큰 코 다치는 사람 수두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