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땅콩 리턴'과 조양호 회장의 철칙

[광화문]'땅콩 리턴'과 조양호 회장의 철칙

원종태 부장
2014.12.16 06:00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리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2011년 초여름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지 못해 난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출발시간 10여 분을 남겨두고 가까스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대한항공 항공사 카운터 직원은 다른 승객들의 출발을 지연시킬 수 있다며 끝내 발권을 거절했다. 아직 이륙까지 10여분이 남지 않았느냐고 하소연하고, 수속을 마치는 대로 곧장 탑승구로 달려가겠다고도 했지만 대답은 역시 '안 된다'였다.

나중에 내가 놓친 비행기를 탄 지인에게서 그 비행기에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이 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조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지연 출발'이라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조 회장이 탄 대한항공 비행기는 세계 어디에서 이륙하더라도 '정시 출발' 원칙만큼은 잘 지킨다고 한다.

1시간30분여를 공항에서 기다린 뒤 좌석에 여유가 있는 비행기를 타고 간신히 제주도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는 조 회장의 이 정시 출발 원칙에 왠지 호감이 갔다. 고객들을 위해 정확한 시간을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항공이나 열차가 고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정직한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사실 일찍 서두르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내 불찰이었다. 대한항공 잘못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직원들이 회장님이 탑승할 때 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이런 원칙을 철저히 지켜준다면 대한항공이 국적 항공사로서 꽤 괜찮은 항공사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분 지각이 준 경험 치고는 값진 교훈이었다.

그러나 지난 5일 뉴욕 JFK공항에서 벌어진 사건은 회장님의 이런 원칙에서 철저히 어긋나 있었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은 250여명의 승객들은 나몰라라 하고 정시 출발은 커녕 이륙 준비를 하러 가던 비행기까지 돌려세웠다. 땅콩을 접시에 담아내야 하는지, 봉지 째 갖다 줘야 하는지, 원하는 사람에게만 줘야 하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다.

대중들이 조 전 부사장의 행태에 이처럼 흥분하는 이유는 그가 오너 3세라는 지위를 업고, 항공기 위에서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그런 행태로 그와 같은 대한항공 203기를 탄 250여명 승객의 안전까지 자칫 위협받을 수 있어서였다. 이미 이륙 준비를 끝내고 활주로로 이동하던 항공기가 오너 3세의 감정 상태 때문에 원 위치했다는 것은 그만큼 원칙보다는 지위와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한국 사회 현실이 잘 녹아 있다.

일찍이 미국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국가나 집단 내에 권력이 불평등하고 불균등한 현상을 '권력간격지수'(Power Distance Index)라고 적시한 바 있다. 말콤 글래드웰은 전 세계 조종사 중 한국 조종사들의 권력간격지수가 브라질 다음으로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민간항공기 조종사들은 대부분 사관학교를 나와 상관과 부하로서 직업군인을 거친다.

이번 땅콩 리턴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말콤 글래드웰은 이 책에서 권력간격지수가 높은 또 다른 국가인 콜롬비아 소속 항공사, 아비앙카 항공기가 JFK공항을 코앞에 놓고 추락한 이유도 소개했다. 아비앙카의 부기장은 최악의 기상 악화와 연료까지 부족한 비상 상황인데도 기장 눈치를 보느라 JFK공항의 관제사에게 "연료가 떨어졌으니 곧바로 착륙해야 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 항공기는 끝내 다른 항공기에 밀려 공중에서 대기만 하다가 연료가 바닥났고, 뉴욕 롱아일랜드 숲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번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 리턴을 둘러싼 본질은 어쩌면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이 '권력간격지수'의 모순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일 수 있다.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갖는 오너 일가라고 해도 논리와 이성, 규정에 맞지 않게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면 대중들은 이를 절대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을 가질수록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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