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기’에 따르면 8월의 한가운데를 의미하는 ‘한가위’는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생겨난 세시풍속이다. 말하자면 한민족이 거의 2000년이나 된 이 풍속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그들의 전체 역사 중 거의 절반이 되는 셈이다. 한가위와 더불어 유구한 시공간에 녹아 있을 그들 삶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고 다양할까.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것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너무나 많이 달라진 삶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무늬는 비슷하지만 그 질감은 꽤나 다른 추석을 보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 시대 사람들도 이 명절 때 차례를 지냈다. 대부분 일가친척이 사당에 모여 차례를 지냈고 차례가 끝나면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성묘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그들은 조상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길렀다. 지금의 자기를 가능하게 해준 조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 한가위의 차례였다. 더군다나 강강술래는 신에 대한 풍년 감사제의 기능도 담당했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한가위는 조상과 신을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되새기는 명절이었다.
또한 이때 우리 선조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공유했다. 뜨거운 여름날의 고단한 노동이 일궈낸 가을의 풍요로움을 함께 누린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강술래나 줄다리기 외에도 씨름이나 소싸움 등을 통해 서로에 대한 우애를 돈독히 했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통놀이 중 대략 95%가 여럿이 함께하는 놀이인 반면 혼자 하는 놀이는 5% 정도에 불과하다. 이처럼 그들은 함께하는 놀이를 통해 더불어 살았고 그 속에서 자신들이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몸소 익히고 실천했다.
이러한 예전의 한가위 풍속도가 오늘날엔 많이 달라졌다. 심지어 1960~70년대와 같은 가까운 과거와 비교해도 그 차이가 뚜렷하다. 지금도 가족은 부모를 중심으로 모이지만 지난날처럼 일가친척이 함께 모여 차례를 지내는 일은 매우 드물다. 조상을 추억하고 기리는 차례의 의미도 많이 퇴색한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지역공동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함께 놀이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민족의 명절 때도 우리는 소수 가족 외 사람들과 서로 분리되어 있는 삶, 소위 원자화된 삶을 살고 있다.
조상을 기억하고 신에게 감사하며 공동체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은 지금의 나를 그 존재들과 연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은 지금의 작은 나를 더 큰 나로 확장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독립적 개인 그리고 경쟁과 능력이라는 삶의 조건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여전히 버겁고 외로울 뿐이다. 서로 연결된 삶을 통해 우리는 작은 나를 더 큰 우리로 만들 수 있고 닫힌 나를 열린 우리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너를 위한 나의 희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함께 가야 할 행복한 길이다.
한편 올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추석을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다. 평생을 가족과 떨어져 살아온 이산가족도 그렇고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도 그렇다. 우리가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다. 게다가 우리가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석을 보낼 수 있도록 정작 본인은 가족과 떨어져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도 많이 있다. 군인 경찰 소방관처럼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는 사람들 덕분에 명절의 안락함과 평화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그런 분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추석(秋夕)이란 가을 저녁 혹은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특히 올해는 보름달이 유난히 컸다. 각자 이 보름달을 보면서 나름 소원을 빌었을 게다. 그런 소원과 더불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해준 선대 조상들 그리고 우리가 지금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기도도 하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