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 즉위 이듬해(1609년) 4월21일, 요즘으로 말하면 감사원에 해당하는 사간원이 간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왕(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해 쫓겨난 전직 어의 허준의 대궐 출입을 막아달라는 요청이다.
삭탈관직 당한 지 1개월. 광해군은 민간의 신분인 허준의 대궐 출입을 허용했다. 동의보감 집필 중 내의원 자료를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선왕을 살리지 못한 어의는 유배를 떠나는 게 당시 당연한 관례였지만 광해군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신하들과 대립각을 세워가며 그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광해군이 허준을 싸고돌기는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정도였다.
시작은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 3월10일 사간원이 허준을 탄핵하면서다. 광해군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사간원과 함께 양대 언론기관 중 하나인 사헌부가 가세했다. 엿새간 두 기관은 네 차례 탄핵을 반복했다. 광해군은 결국 허준을 삭탈관직했지만 대궐 출입을 허용해줬다.
왕과 신하들의 기싸움이 본격화됐다. 사간원 등이 아예 멀리 유배를 보내라고 하루가 멀다하고 간언하자 광해군은 이를 수용하는 듯 하지만 즉위 3년째 그를 사면하고 어의로 임명했다.
요즘 가장 '핫'한 의료인을 대라면 단연 김상만 녹십자아이메드 원장이다. 주치의를 무시하고 청와대를 드나들며 박근혜 대통령을 진료한 주인공이다. 박 대통령, '비선실세' 최순실씨와 10여 년 인연의 끈이 이토록 질길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정 의료인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진 건 광해군이나 박 대통령이 비슷하다. 그러나 두 지도자를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 허준 덕분에 두 번이나 목숨을 건졌다. 신하들은 어쩌면 임금이 사사로운 정 때문에 허준을 감싸고 돌았다고 봤을 것이다. 광해군이 폭군이기는 했지만 허준의 그릇을 알아본 건 부인하기 어렵다. 허준은 동의보감이라는 역사에 길이 빛날 의학 대백과 사전을 집필 중이었다.
반면 박 대통령이 김 원장에게 진 '빚'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목숨을 구해줬는지 중병을 치료해줬는지 알 길이 없다. 청와대가 사들인 태반주사, 백옥주사, '제2 프로포폴'로 불리는 마취제 에토미데이트리푸로주(에토미) 등으로 김 원장의 역할이 미뤄 짐작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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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김 원장과 차움의원으로부터 사사로운 신세(보기에 따라 1억5000만원짜리 차움 회원권은 사사롭지 않을 수 있다)를 진 결과를 온 국민은 똑똑히 보고 있다. 차병원이 체세포 배아줄기세포 연구 승인을 받고 192억원 국고지원을 받은 게 특혜가 아니라는 차병원과 정부 주장을 믿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김 원장의 행적과 청와대가 사들인 의약품은 대충 얼버무리다 끝날 일이 아니다. 검은 바다 아래 304명이 수장될 동안 박 대통령의 7시간을 규명할 열쇠가 될 수 있어 언론은 파헤치기를 멈출 수가 없다.
400년 전 광해군과 허준은 해피엔딩이었다. 앞으로 400년 뒤 후세는 박 대통령과 김상만 원장을 어떻게 볼까. 이변이 없다면 반면교사의 사례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