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질곡을 거치고 기형적 근대화와 독재정권을 겪으면서도 그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짧은 기간에 발달시켰다. 그렇게 이룩한 민주주의의 요체요 보루라 할 수 있는 사법부가 이전 정부에서 작정하고 저지른 국정농단은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을 넘어 좌절하고 허망하게 만든다. 과연 우리가 지금껏 발달시킨 민주주의가 속속들이 온전히 제 본모습을 띠는 것인지, 아니면 허울 좋은 외양만 갖춘 채 그 이면에는 끊임없이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는 승냥이떼가 우글거리는 야생의 불모지에 불과한 것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경쟁하는 것만큼이나 협동하고 희생할 필요가 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기적 집단보다 공동체의식과 도덕성을 갖춘 집단이 생존에 더 적응적이다. 강력한 포식자들의 위협이나 불리한 물리적 조건 혹은 다른 무리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할 때, 혼자의 미약한 힘으로 대처하기보다 협동을 통해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이때 도덕성을 갖춘 집단이 협동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고 이것이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사회적 정의는 이처럼 부도덕과 그름에 대비해 도덕과 옳음을 지향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정의의 기초가 되는 친사회적 행동은 생의 초기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한 조건에서 실험자에게는 쿠키가 없는 빈 접시를 주고 영아에게는 4개 쿠키가 들어 있는 접시를 주었다. 이때 실험자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쿠키가 있는 쪽으로 자신의 팔을 쭉 뻗어 먹고 싶은 욕구를 드러냈다. 그 결과 실험자가 팔짱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2개의 쿠키를 가지고 있는 조건에 비해 도움과 나눔이 필요한 조건에 있을 때 영아들은 실험자에게 자신의 쿠키를 더 많이 나누어 주었다. 이처럼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려는 동기는 생의 초기부터 발달해 아주 어린 아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게임을 통한 연구에서도 공정성과 같은 정의를 달성하려는 인간의 동기를 잘 볼 수 있다. ‘최후통첩게임’으로 불리는 이 게임에 참가하는 두 사람은 주어진 금액의 돈을 어떻게 나눌지 논의한다. 이때 한 사람은 돈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제안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상대방의 제안을 수용할지, 아니면 거절할지를 결정한다. 이 사람이 거절할 경우 두 사람은 모두 어떠한 돈도 받을 수 없고 수용할 경우 분배를 제안한 사람의 뜻대로 돈을 나누어 갖게 된다. 연구결과 대부분 사람은 자신들에게 상대방이 전체 액수의 25% 이하를 배정하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그 액수만큼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대방의 제안을 거절했다.
제3자처벌게임에서도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그들은 자신과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자기 돈을 쓰면서까지 다른 두 사람 사이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사회적 정의에 대해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이때 이러한 욕구가 좌절될 때 사람들은 분노, 좌절, 우울, 무기력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겪는다. 더 나아가 최후에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이기적 행동만 추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공동체는 부정과 비리로 붕괴한다. 우리가 사법부의 비리와 부정을 낱낱이 밝히고 관련자들에게 합당한 단죄를 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공정한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구성원을 양산할 뿐이고 그것은 사회가 무너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