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나홀로' 지낸다. 거리에서 커플을 보는 것이 이젠 귀한 일이 됐다. 이래서야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주체 또는 주체성이라는 철학용어부터 얘기해보자. 영혼 없는 객체가 돼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내 자신이 세상을 이끄는 주인이 된다는 의미다. 주체라는 말을 들으면 북한을 떠올리기 쉬운데 원래는 독일 철학에서 나온 용어로 과거 이를 수입한 일본에서 유행했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압력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개인이 주체성을 잃으면 집단최면에 걸려 파시즘 같은 광기에 쉽사리 빠지게 되거나 국가의 공권력 앞에서 용기를 못 내고 쉽게 머리를 숙인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개인이 주체적이어야 하는데 여기에 중요한 착시가 하나 있다. '나는 나야' 식으로 '나홀로' 개인이 주체성의 기본단위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홀로' 개인은 그다지 주체적일 수 없다. 그렇다고 북한 주체사상이 주장하듯 집단이 주체성의 기본단위가 될 수도 없다. 주체성은 집단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적 주체'라는 말은 '눈부신 암흑' 같은 옥시모론(oxymoron), 모순이다.
독일의 사회사상가 하버마스는 근대 민주주의 등장을 추적하면서 근대적 주체성을 만들어내는 기본단위를 2명으로 이뤄진 '짝'(커플)이라고 했는데 연애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외롭게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짝을 이루지 않는 경우 집단의 최면 내지 압력에 쉽게 굴복한다는 것이다. 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세상 전체와도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도 하버마스의 주장을 입증한다. 메이지 초기 꽤나 자유로웠던 일본이 19세기 말 군국주의 국가로 급격히 변화하는데 일본 정부가 가족법을 대대적으로 바꾼 결과다. 부부 사이가 친근하면 전쟁하는 국가를 만들기 어렵다는 계산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부부의 친근함은 부부 사이가 평등해서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데서 나오는데 메이지 정부는 이 평등을 깨버렸다. 남편에게 권력을 주고 아내는 한정치산자 수준으로 민법적 지위를 낮춰버린 것이다. 그러자 남편은 '고슈진'(주인)이 됐고 아내는 집안 깊숙한 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의미의 '오쿠상'이 돼버렸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낮춰보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미워하게 된다. 이렇게 모두 외로워지는데 이럴 때 국민은 국가의 승리니 영광이니 하는 자신과는 직접 관계도 없는 허망한 집단적 명예에 열광하게 된다. 또 외로운 사람들은 휘날리는 깃발에 눈물 흘리고 거리로 나와 패거리 지어 서로 싸운다.
한국은 외로워지고 있다. 외로우니 '인정받기'에 집착한다. 회사에서 잘나가 인정받고 싶고 SNS에 멋진 글이나 사진을 올려 인정받고 싶다. 외로운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갈구하고 집단광기에 노출된다. 민주주의는 당당한 개인들로 이뤄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당당한 개인은 '1인 1조'가 아니라 '2인 1조'여야 한다. '나홀로' 개인은 주체성을 가지기 어렵다. 외로움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