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16년 전인 2008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필자가 다니던 회사에서 복장규정이 변경됐다는 내용이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동안 남성 직원들은 사내 체육대회일을 제외하고 줄곧 양복에 넥타이를 매는 게 필수규정이었는데 게시판 공지 이후부터 1주일 중 수요일과 금요일은 캐주얼데이로 명명해 그날은 캐주얼풍 의상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게 됐다.
이후엔 캐주얼데이도 없애고 복장이 완전히 자율화됐다. 이 회사는 원래 남성 정장을 주요 아이템으로 매출을 일으키는 패션회사로 꽤 오랫동안 국내 1위를 유지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경직된 한국 조직문화에 찾아온 큰 변화의 물결에 발맞춰 줄어드는 남성 정장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캐주얼브랜드를 론칭했다. 결과적으론 전체 매출을 높여가는 성공적인 전략을 펼친 것이다.
아직도 예전 보수적인 조직문화가 팽배한 일본도 한국처럼 과격하게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남성 정장 시장이 꽤 많이 축소돼 관련 패션 대기업들은 닥쳐온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도출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오야마(AOYAMA) 아오키(AOKI) 코나카(KONAKA)가 일본의 남성 정장 메이커 빅3 브랜드인데 이 중 아오키의 변신이 제일 놀랍다.
아오키는 1958년 나가노시의 개인상점 '양복의 아오키'로 창업한 후 전국적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가면서 1991년에는 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까지 성공한 굴지의 대기업이다.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불황터널을 지나오면서도 실적은 꿋꿋하게 버텼으나 어쩔 수 없는 정장시장의 하향세로 적자를 면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런 위기의 아오키를 구해낸 것은 한국 패션회사의 캐주얼의류처럼 같은 업종에서 만회한 것이 아니다. 의외의 이종업종에서 그 해결점을 찾았다. 최근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 대도시를 방문하면 기존에 못 본 '쾌활클럽'(快活CLUB)이라는 간판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 쾌활클럽이 바로 아오키를 살린 복합공간 서비스 브랜드다.
언뜻 쾌활클럽이란 간판만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는 공간이나 모임으로 상상 되지만 이곳은 '만화방' 'PC방' '간편숙박' 등을 합쳐놓은 복합공간이다.
일본을 자주 방문하는 여행전문가 사이에선 이미 가성비 높은 명소로 알려진 이곳을 이용하려면 우선 370엔(약 3500원)을 내고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그러면 전국 지점 어디에서나 사용이 가능한 카드를 발급받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요금은 시간제다. 이를테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1인 독실의 경우 3시간 이용하는데 1680엔(약 1만5800원)이 과금되고 12시간을 이용하면 5170엔(약 4만8500원)이 든다. 한국 PC방과 비교하면 비싸게 느껴지지만 한국엔 없는 1인실과 무료로 이용하는 만화책, 샤워실과 용품, 음료, 아이스크림, 안마의자 서비스 등을 놓고 보면 여행객이나 잠깐의 휴식이 필요한 고객 입장에선 가장 저렴한 공간이다. 도쿄 신주쿠 중심가에도 쾌활클럽이 있는데 매우 비싼 땅임에도 대로변 9층짜리 단독빌딩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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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는 주요 사업으로 쾌활클럽에 지속투자한 결과 지난해 기준 전국에 485개 지점을 냈고 회사 내 매출비중도 패션사업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
아오키는 이밖에 '핏24'(FiT24)라는 24시간 체육관을 오픈하고 복합카페 '지유스페이스'(Jiyu Space)를 인수하는 등 의류제조업과 다소 거리가 있는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로 변신하며 회사를 성장시켰다. 한 분야만 고집하며 100년 이상 지킨 기업이 유독 많기로 유명한 일본도 급변하는 트렌드에 적응하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변신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편 아오키는 이 쾌활클럽이 자리잡은 빌딩이나 인근에 아오키 브랜드 옥탑간판을 설치하거나 매장들을 오픈하면서 시너지를 내며 최근 2년간 남성 정장 매출이 증가하는 놀라운 결과를 창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