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 미사에선 여러 순간 평화를 기원한다. 사제가 주님의 기도 이후 평화를 기원하며 하느님의 어린양 기도에선 평화를 주소서라는 기도를 한다. 특히 평화의 인사는 사제가 신자들에게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는 말을 하면 신자 간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는 예식이다. 이처럼 기독교에서 평화는 핵심적인 교리로 받아들여진다.
평화란 무엇일까. 이는 국가적·사회적으로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 개인적으로 물질적·정신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갈등이나 고민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국제법에선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의미를 넘어 정의·안보·인권과 경제적 번영이 보장되는 상태가 지속되는 적극적 의미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평화는 사랑과 용서, 화해로부터 오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현실세계에선 보다 실질적인 평화의 수단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법(Law)과 정의(Justice)다. 정의는 개인과 공동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보장하는 개념으로 평화의 토대가 되고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공식적인 체계로 평화를 유지하는 도구다.
하지만 최근 계엄과 탄핵 이후 한국의 상황은 법이 평화를 달성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헌법 규정 해석을 둘러싼 여야의 극명한 차이가 정국을 불안하게 한다. 비상계엄이 통치행위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계엄요건을 위반한 것인지, 내란죄 해당 여부, 대통령 권한대행의 탄핵소추 의결정족수는 대통령 기준 재적의원 3분의2인지, 재적 과반수인지, 국회 추천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에 대해 대통령 권한대행은 임명권 행사에서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는지, 국회의 권한쟁의 심판청구에 국회 의결이 필요한지, 헌법재판소의 권한쟁의 심판에 대해 대통령 권한대행은 구속되는 것인지, 재판 중인 대선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 소추되지 않는다는 헌법 규정은 재판중지를 포함하는 것인지 등이 그 사례다.
사실 이런 헌법 해석상 갈등은 위 사례가 모두 초유의 사태로 선례 해석이 없는 데서 비롯됐지만 여야가 각각 헌법과 법률상 고유권한과 수적 우위를 근거로 헌법을 해석하는 것도 이유가 된다. 다수당은 국회 의결사항인 경우 무엇이든 수적 우위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며 대통령 권한대행은 고위직 임명권, 법률안 거부권 행사를 통해 헌법을 해석한다.
결국 이런 헌법 해석은 극단적인 형식주의적 법 해석을 초래한다. 이는 헌법 문언규정과 구조에 치중해 요건의 해당 여부를 판단하는 경향을 말하는데 이로 인해 법의 지배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가 돼 법치주의를 훼손한다. 더 문제는 헌법 규정을 정치적 유불리를 기준으로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념의 잣대로만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헌법 해석은 단순한 법률 해석을 넘어 권력관계를 조정하고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평화를 위협하는 헌법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선 종국적으로 헌법재판소가 객관적·독립적으로 헌법의 권위를 적절히 행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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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민주주의에선 인내와 양보가 필수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선 헌법 규범보다 비공식적 규범으로서 '상호관용'과 '자제'가 중요하다고 봤다. 상호관용은 정치적 경쟁자라도 정당성을 인정하고 반대세력을 적으로 대하지 않는 태도를, 자제는 법적 권한이 있어도 이를 남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법과 정의가 형식적·강제적 수단 외에 대화와 화해의 도구로 활용될 때 지속가능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사랑, 용서, 화해의 정신은 헌법 규범의 내재적 가치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