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전생

[청계광장]전생

혜원 구리 신행선원장
2025.11.14 02:05
혜원 구리 신행선원장
혜원 구리 신행선원장

전생이란 대체로 금생(今生) 이전의 생을 의미해 전생(前生)이라 하기도 하고 생이 다른 생명으로 전이된다는 환생과 같은 말 전생(轉生)도 있다. 대표적으로 힌두교나 불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인데 의외로 비종교인들도 전생에 대한 말들을 심심찮게 할 만큼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민중의 정서에 영향을 끼쳤다. 절에서 기도하다 할렐루야를 외치는 불자가 있는가 하면 교회에서도 나무관세음보살, 아멘 하는 신자들이 있듯 종교와 관계없이 전생을 염두에 둔 듯한 말들을 한다.

"너는 전생에 공주였던 것 같다" 혹은 "전생에 너는 소 였던 것 같다" 등 현재 상대의 느낌에서 비슷할 것 같은 이미지를 연상해서 추측한다. 불교에서 영향을 받았겠지만 무속인들도 전생을 말한다. 물론 그런 추측이나 확신들을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다.

고생물학자 닐 슈빈에게 전생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모든 생명의 진화과정 전체가 우리의 전생이라 할 것이다. 혹은 물리학자에게 묻는다면 전생을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뇌과학자 중 일부는 좌뇌와 우뇌가 분리됐을 때 서로 다른 인격으로 보이는 것을 예로 영혼은 없다고 하기도 한다. 불교에서 주로 전생을 거론할 때는 불가해한 현실의 사건을 손쉽게 설명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무슨 일이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 전생을 거론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현실에 좌절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안주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힌두의 카스트 개념과 다를 바 없다. 카스트는 전생에 귀족이면 현생에도 귀족이며 전생에 천민이었다면 현생에도 천민으로 산다는 믿음이다. 지배계층 입장에선 아주 편리한 통치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와 보편적 교육의 효과로 서서히 신분의 경계가 허물어지지만 여전히 공고한 편이다.

하여튼 전생이라는 개념은 역사와 문화적 측면이 강해서 단순한 긍정이나 부정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때때로 그 전생이라는 개념이 괜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거나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는 문제들이 일어난다. 어떤 사이비 종교인은 그저 평범한 사람을 전생의 죄를 거론하며 거금을 들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거나 헌금을 강요하기도 한다. 현생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그를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뜨린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빚을 지우기 때문이다.

또는 현생에 불행을 겪는 이에게 "네가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이렇게 됐다"고 한다면 그 말은 헛소리에 불과한 악담이다. 불행하고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을 어떤 사람들은 패배자 혹은 흙수저, 루저(loser)라 부르며 비하하지만 그것은 편견이다. 살면서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누구도 행복하게만 살지는 못한다. 오히려 불행을 겪고 그것을 극복한 사람들은 대체로 그 마음이 굳건해 쉽게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반면 의외로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이들이 작은 불행에 쉽게 좌절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보왕삼매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곤란이 없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긴다. 그러므로 성인은 항상 곤란 속에서 살아간다. 베드로전서에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영광으로 여기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영광을 돌리라고 권한다. 하늘이 장차 큰 사람을 낼 때에 큰 고난을 내린다는 맹자의 말도 있다.

차가운 계절이다. 인연이 되는 이들에게 작은 마음의 선물이라도 하면 좋겠다. 작은 친절은 결코 작지 않다. 원자를 나눠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내듯 세상을 밝히고 데울 것이다.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 한 생각의 전생은 무엇일까. 다만 지금이라는 용광로에 모두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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