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들은 성장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성장은 식민지와 전쟁으로 인한 폐허속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전략이자 집단적 내러티브가 됐기 때문이다. 성장에 대한 강력한 선호는 투자 영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의 성장을 향한 열망은 새롭게 체득한 국제적 감각과 결합해 미국 시장에 대한 대대적 투자로 이어졌다. 서학개미라는 용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자연스럽게 한가지 질문이 따라온다. "우리는, 한국 시장은 왜 유망한 기업을 더 크게 성장시키지 못할까?" 답은 '미싱 미들'(Missing Middle)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기업 생태계는 초기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탄탄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대규모 설비·인력 투자가 필요한 스케일업 단계에서는 자금조달의 공백을 맞는 일이 다반사다. IPO(기업공개)를 하기에는 조금 이르고 초기에 투자받은 VC(벤처캐피탈) 자금이 고갈되는 구간. 이를 '미싱 미들'이라고 부른다.
최근 정부가 '생산적 금융'을 핵심 아젠다로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경제 성장에 필요한 적재적소에 '모험자본'을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다. 우리 금융투자업의 핵심과제는 바로 성장 기업이 미싱 미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본을 투입하는 것이다.
지난 10여년간 금융투자업은 성장동력이 아닌 고수익성 자산에 집중했다. 지난해 종합금융투자사업자의 IB(기업금융) 업무 중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 비중이 48%에 육박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기술 성장보다 안정성이 높은 부동산으로 자본이 쏠린 결과다. 같은 시기 미국은 일찌감치 AI(인공지능)·바이오 등 신성장 산업으로 자본흐름을 빠르게 전환했다. 나스닥 성장에 전세계가 열광하는 배경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기업 성장 단계에 따라 적재적소에 필요한 자금을 연결하는 금융 본연의 역할을 회복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미싱 미들을 해소하고 새로운 대기업, 스타 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본의 성격을 다변화하는 것이다. 지분 희석 부담 없이 성장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벤처 대출(Venture Debt)을 활성화하고 대규모 설비 투자를 전담할 '스케일업 전용 펀드'를 조성해야 한다. 또 초기 투자자의 회수 자금이 다시 새로운 기업 투자로 이어지도록 회수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 IPO 이전 단계의 비상장 주식을 매입하는 '세컨더리 마켓'을 육성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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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뒷받침할 IB 역량 강화도 필수다. 부동산 PF 중심에서 벗어나 M&A(인수·합병) 자문, 글로벌 파트너 연결 등 상장 전후 기업가치를 높이는 종합 솔루션 제공자로 거듭나야 한다.
다행히 금융업계는 모험자본 투자 계획을 내놓고 투자를 실행하며 '성장형 금융'으로의 구조 전환 신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투자로 새로운 기업이 탄생하면 그 열매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성장 기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내 투자 기회를 확대한다. 해외로 쏠린 자금이 국내 혁신기업으로 흐르면 기업성장과 국민자산증가의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미싱 미들을 채우는 금융으로의 변화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국내 자본시장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다음 단계로 도약시킬 것이다.
윤병운 NH투자증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