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인간 영역 대체해 역할 잃은 개인
인간의 본질 고민하게 된 점은 긍정적
'자유로운 사유' '과감한 자비' 확산되길
제목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한 인공지능 구글 제미나이의 답변은 이렇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역할이 밀려나는 듯한 현상은 역사의 반복이지만, 인공지능(AI)이 가져오는 소외는 과거의 기계화와는 결이 다른 층위의 질문을 던집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육체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며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낳았다면, 지능형 시스템은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여겼던 인지, 판단, 창작의 영역에 개입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소외감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소외의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노동과 효용에서의 소외(기능적 대체), 주체적 사유와 판단의 소외(인지적 외주화), 관계와 감정의 소외(유사 인격과의 대체)."
인간이 저 세 가지로부터 소외될 때 이 사회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얼마 전 오픈AI의 비공개 인공지능 1만 개가 백 년 수학 난제 300건 이상을 해결했다고 한다. 수(數)를 구도적 영역으로까지 여기며 깊은 추론을 이어가던 수학자들은 큰 충격과 더불어 우려를 표했다. "그것은 수학을 추구하는 목적에 위배된다"며 그간 수학자들이 추구해 왔던 이상과는 배치되는 과정과 결과에 당황스러운 상황인 듯하다.
이런 상황은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패했던 10년 전 바둑 대결 때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아무튼 경제 논리로 AI가 인간의 역할을 급속도로 대체해 갈 것은 분명하다. 대규모 실업과 이로 인한 시장경제의 재설계나 보완을 정부와 시민들이 어떻게 해결해 갈지도 중요하지만, 떠밀리다시피 역할을 잃어버린 개인들의 상실감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생존과 경쟁에 떠밀려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어쩌면 묻어 두었던 해묵은 고민들을 각자가 꺼내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사람이 기능적 역할을 떠나 본질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우리는 왜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고, 부를 쌓아야 하며, 이름을 더 높이려 애쓰고 살아가나. 인류의, 혹은 그 이전 생명체가 진화해 오며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역사로 각인된 생존본능. 그 본능이 비교하고 경쟁하며 도전하게 한다. 그 긴장과 두려움이 인공지능에게도 똑같이 향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와 후손, 그리고 인류를 위해 더 나아가 욕망이 거세된, 어쩌면 신에 가장 가까운 AI를 위해서도 말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우리를 염려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번민거리는 의식주의 해결이다. 물론 의식주의 갈래도 구만 층이다. 더 나아 보이는 의식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여전히 달려갈 것인지, 아니면 반강제적 해탈 속에서 실존적 자신을 마주할 것인지 역시 개인의 선택이다. 비근한 예로 주변의 퇴직자분들을 보면 두 가지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평생 직장 생활을 하며 기능해 왔던 그들은 퇴직 후 깊은 허망감과 자존감 상실로 무기력해지는가 하면, 반대로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거나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 그동안 감춰 두었던 예술적 재능을 개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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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윤광조 선생님은 분청사기 작업을 해오셨는데 창작의 벽을 맞아 그것을 넘어서려 수만 배의 절을 하며 궁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끝에 평생을 사용해 왔던 물레를 버렸다 한다. 물레를 버리니 진원의 둥근 작품은 못 만들지만 온갖 모양은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익숙한 방법, 당연한 조건들을 과감하게 탈피하는 것을 보면 숭고한 구도자와 같다. 특히 수행자들이라면 한 번쯤 되새겨 봄 직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과거 운수납자들의 자유로운 사유와 과감한 자비를 앞으로의 인류에게서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남산에 올라 본 적이 없는 서울 시민이 얼마나 될 것이며 한강 변에서 한강 라면을 못 먹어본 바쁜 시민들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엎어지고 쉬어가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