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렉코노미(Eleconomy)
AI(정보기술)가 세계 기술 패권을 재편한다. 탄소중립은 산업과 생활 전반을 뒤흔든다. 두 흐름의 출발은 달랐지만 결국 '전기(Electricity)'라는 한 지점에서 만난다. 수요는 폭발하는데 공급은 제한적이다. 이 '전력의 역설'이 'AI-전력-자본'의 3각축을 불러왔다. '일렉코노미(Eleconomy)'다. 일렉코노미 시대, 아름다운 '에너지 믹스'와 '국가 전략'을 고민해본다.
AI(정보기술)가 세계 기술 패권을 재편한다. 탄소중립은 산업과 생활 전반을 뒤흔든다. 두 흐름의 출발은 달랐지만 결국 '전기(Electricity)'라는 한 지점에서 만난다. 수요는 폭발하는데 공급은 제한적이다. 이 '전력의 역설'이 'AI-전력-자본'의 3각축을 불러왔다. '일렉코노미(Eleconomy)'다. 일렉코노미 시대, 아름다운 '에너지 믹스'와 '국가 전략'을 고민해본다.
총 15 건
안정적 전원 공급과 저렴한 전기요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원전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처리는 원전이 지닌 숙제다. 지금도 사용후핵연료 저장 공간 부족 사태가 빈번히 발생한다. 보관할 장소가 부족하니 임시방편으로 새로운 공간으로 옮기는 과정이 반복되고 막대한 비용도 발생한다. 11일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고리 원전본부의 사용후핵연료 저장 포화율은 92%을 넘는다. 한빛 84. 5% 한울 72. 5% 순이다. 사용후핵연료를 영구 격리하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최종 처분장 설립까지 30년 넘게 남은 상황에서 보관할 장소가 부족해질 경우 멀쩡히 사용가능한 원전의 가동 중단 사태가 먼저 찾아올 수 있다. 이미 전국에 위치한 원전에서는 사용후핵연료 이동 전쟁이 펼쳐진다. 통상 원전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는 해당 호기의 습식저장조에 보관한다. 한빛 1호기의 저장조 용량은 2105다발인데 지난해 기준 1900다발을 넘겼다. 여유공간이 부족해 뒤늦게 지어진 한빛 3,4,5,6호기의 저장조를 활용한다.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에너지믹스 구성에 원전을 빼 놓고 얘기할 순 없다. 재생에너지 확대 만큼이나 기저전원으로서 원전의 역할은 중요하다. 특히 인공지능(AI) 투자 확대로 전 세계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재생에너지만으로는 전력수요를 온전히 감당하기 어렵다. 세계 각국과 주요 빅테크 기업들이 다시 원전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다. ━급증하는 전력수요…재생e만으론 한계━ 11일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 전력수요 증가 속도는 전체 에너지 수요 증가 속도의 2배에 달한다. 2035년 전력수요는 현재보다 40% 증가한 3만7800TWh(테라와트시)로 예상되는데 이는 지난 10년 간 증가 추세보다 더 빠른 속도다. 전기수요 증가분의 상당수는 AI로 인한 것이다. 지난해 데이터센터 투자액은 약 5800억달러(약 846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AI 서버 전력 소비량은 2030년까지 5배 증가할 전망이다. 데이터센터 1곳이 필요로 하는 전력량은 약 200MW(메가와트)로 이는 약 20만가구의 연간 전력 사용량과 맞먹는 규모다.
제주도 남서쪽,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로 가는 길목에 가파도가 있다. 모슬포 인근 운진항에서 여객선으로 10여분이면 닿는다. 면적은 0. 87㎢. 여의도의 약 3분의 1 크기다. 주민은 200여명 남짓. '삼다도' 제주의 부속 섬답게 바람이 거세다. 특히 겨울이면 바람이 세고 파고가 높아 뱃길이 끊기기 일쑤다. 가파도를 방문한 지난달 12일에도 섬 곳곳에 강한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휘청일 정도로 파고가 높았다. 하지만 섬에 닿자 반전이 일어났다. 평탄한 지형 덕에 따스한 햇살이 섬 전체를 고르게 비췄다. 풍부한 바람과 태양. 재생에너지의 최적지다. 정부 지원과 천혜의 자연조건 덕에 가파도는 2016년 한때 'RE100(재생에너지 100%)'을 달성했다. 섬의 모든 전력을 재생에너지만으로 충당했다. 영광은 짧았다. 가파도 RE100 사업은 각종 문제점을 드러내며 2022년 멈춰 섰다. 마을 곳곳엔 여전히 태양광 패널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주택들이 눈에 띄었다. 과거 RE100 사업 당시 정부 보조금으로 설치된 것들이다.
경기도 여주시 구양리. 약 70가구 120여명이 사는 작은 농촌 마을이다. 인근에 세종대왕릉이 있다는 것 외엔 특별할 게 없던 이 곳에 최근 전국적 이목이 쏠린다.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장, 국무총리, 장관 등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다. 전국 농촌 지방자치단체의 벤치마킹 방문도 줄을 잇는다. 마을공동체가 태양광 발전으로 수익을 내고 주민과 나누는 '햇빛소득마을'의 모범 사례로 꼽힌 덕분이다. 지난달 10일 찾은 구양리 새마을식당. 점심 준비가 한창이었다. 메뉴는 동태찌개와 콩나물무침, 각종 나물. 소박하지만 따뜻한 이 밥상은 '무료'다. 마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민의 점심을 책임진다. 마을주민들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구양리 행복버스'도 무료다. 매일 오전 9시30분에 운행하는 행복버스는 여주 시내 관공서와 병원을 오간다. 거동 불편한 어르신들의 발이다. 대중교통이 부족한 여느 농촌과 달리 주민 편의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비결은 '태양광'이다. 구양리는 마을회관, 창고, 체육시설, 주차장 등 마을의 공동자산을 활용해 1000kW(킬로와트)급 태양광 발전시설 6기를 올렸다.
세계 최대 전기차 사업자 테슬라는 발전 사업자이기도 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만 500㎿(메가와트)의 전기를 공급한다. 호주·영국 등의 사업장까지 더하면 보수적으로 잡아도 테슬라의 전기 공급 규모는 600~800㎿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국내 석탄화력발전소 1기가 생산하는 발전용량에 육박하는 규모다. 테슬라는 자체 ESS(에너지저장장치)인 파워월(Powerwall)과 전기차 배터리 등 형태로 분산돼 있는 에너지 자원을 ICT(정보통신기술)로 통합해 하나의 발전소인 것처럼 에너지를 공급한다. 이른바 가상발전소(VPP, Virtual Powerplant)다. 전력 수요가 급증할 때 테슬라는 VPP 플랫폼에 연결된 ESS나 전기차 배터리의 방전을 유도해 캘리포니아 지역 전력망에 전기를 공급한다. 반대로 신재생에너지 생산이 급증할 때 VPP 플랫폼에 연결된 ESS나 전기차 등이 잉여 전력을 최대한 흡수한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프레시던스리서치 등에 따르면 2022년 10억8000만달러(약 1조5900억원)였던 VPP 시장 규모는 지난해 62억8000만달러(약 9조2800억원) 규모로 커졌다.
매년 급증하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는 전기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지만 탄소중립이라는 과제도 달성해야 한다. 화석연료가 아닌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무탄소 전원으로의 혁신이 불가피한 이유다. 문제는 공급망이다. 급증하는 전력을 감당할 인프라 확충과 화석연료 중심의 전력시장 개편이 시급하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전력망 건설은 님비(NIMBY)에 막혔고 전력시장 개편은 민영화 논란에 갇혔다. 목표와 현실이 충돌하는 '전력산업의 딜레마'다.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 구축이 절실한 시점이다. 데이터센터의 전력 식탐은 예고된 미래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은 2022년 460TWh(테라와트시)에서 2026년 1050TWh로 급증할 전망이다. 불과 4년만에 2배 이상 뛴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1년 전력수요(568TWh)의 2배이자 일본(940TWh)과 맞먹는 규모다. AI 학습과 추론 과정에 필요한 복잡한 수학적 연산 탓이다. 고도화된 반복 연산은 전력을 대량 소모한다.
한국 전력시장이 중대한 변곡점에 섰다. 인공지능(AI) 확산과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전환기다. 전력 수요와 시스템 복잡성은 과거와 차원이 다르다. 반면 시장 운영 구조는 20여년 전, 개편 초입 단계에 멈춰 섰다. 공공재 논리로 버텨온 기존 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 구조적 모순이 쌓이며 전력 공급의 기본인 안정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국내 전력시장의 문제는 △전력시장 운영구조 자체의 한계 △변동성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계통·시장 운영 문제 △화력발전 연료 가격 변동에 대한 대응 체계 부재 등 세가지로 정리된다. 이중 첫 번째는 제도 설계의 실패다. 나머지는 환경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구조적 직무유기다. 한국은 당초 단계적 구조개편을 꿈꿨다. 한전 발전 부문을 떼어내고 도매시장을 열었다. 배전 분할과 소매시장 자유화로 가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2004년, 배전 분할이 중단되며 시계가 멈췄다. 이후 제도는 땜질식 처방에 그쳤다. 진정한 경쟁 구조로의 전환은 요원해졌다. 그 결과 현재 전력시장은 기형적이다. 6개 발전공기업과 민간 발전사가 공급하고 한전이 독점 구매한다.
쏠려도 너무 쏠려 있다. 현재도, 미래도 마찬가지다. 데이터센터 이야기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2025년 6월 기준, 국내 데이터센터 161개 가운데 101개가 서울·경기·인천에 위치한다. 미래 수요도 여전하다. 향후 전력공급이 필요하다고 신청한 140여건중 81곳이 수도권을 지목했다. 전체 수요의 60%가 이미 포화 상태인 수도권에 몰린다.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기업, 인재, 인프라가 있다. " 전력업계 관계자의 말처럼 수도권의 유인력은 강력하다. 산업적 특성 탓이다. 금융·게임·AI(인공지능) 서비스는 네트워크 지연에 극도로 민감하다. 고객사와 본사가 밀집한 수도권은 포기하기 힘든 최우선 선택지다. 현실적 계산도 작용한다. 유지보수 업체와 IT·보안 전문 인력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장애 대응 속도가 빠르고 비용도 절감된다. 전력·통신 등 기존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반면 지방은 리스크가 크다. 송전망 건설 과정에서 주민 수용성 문제와 인허가 난관에 부딪힌다. 결국 기업 입장에서 '수도권 집중'은 철저히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다.
"전 세계적인 전력망 부족 사태, 원인은 재생에너지입니다. 발전소 위치와 소비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새 송전망 건설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 한국전력에서 송변전설비 건설을 책임지고 있는 이성학 계통정책기획실장은 단호했다. 그는 최근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재생에너지 시대의 전력망 건설 당위성을 역설했다. AI(인공지능)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한 탓도 있지만 본질은 '에너지 생산 방식과 장소의 변화'다. 이것이 새로운 전력망 수요를 만들고 있다. 이 실장은 "전후 60여 년간 전력망을 촘촘히 깔아왔기에 더 이상의 대규모 건설은 없을 줄 알았다"고 했다. 오판이었다. 그는 "지금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전력망 부족에 시달린다"며 "탄소중립을 위해 재생에너지를 늘리면서 필연적으로 새 길을 뚫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재생에너지는 화석연료와 결이 다르다. 화석연료가 '중앙집중식'이라면 재생에너지는 '분산형'이다. 대량으로 생산한 전기를 전국적인 전력망을 통해 일방향으로 송배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에서 생산한 에너지를 지역에서 소비하는 형태다.
석유를 담보로 투자받던 시대는 저물었다. 20세기 자본이 지하의 검은 황금, 석유를 쫓았다면 2026년의 자본은 인공지능(AI)과 이를 가능케 하는 테라와트급 전기를 찾는다. 미국 데이터센터 인프라업체 노바(Novva)의 사례가 상징적이다. 이들은 2025년 3월 전력회사의 '전력공급 확약서' 한 장으로 JP모건에서 20억달러(약 2조9000억원)를 조달했다. 알고리즘과 코딩에 베팅하던 월가의 돈줄이 전력망과 데이터센터라는 실물 인프라로 방향을 틀었다는 의미다. 국가 예산을 뛰어넘는 빅테크의 자본과 월가의 금융 공학이 결합한 새로운 질서, '일렉코노미'(Eleconomy)의 태동이다. ━◇ '전력공급 확약서', 2. 7조원짜리 수표가 되다━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AI 경쟁력의 핵심은 '누가 더 똑똑한 언어모델(LLM)을 만드느냐'는 설계의 영역이었다. 이제 질문이 바뀌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전기를 얼마나 빨리 확보하느냐'의 과제다. AI가 아니라 '전기화된 지능'(Electrified Intelligence·이하 EI)이라 불러야 할 판이다.
20세기가 '석유'로 세계 질서가 재편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전기'로 패권이 갈리는 시대다. 단순히 '전기의 시대'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전기는 더 이상 생활 편의 수단이 아니다. 국가의 존립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다. 먹고, 자고, 일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전기 위에서 돌아간다. 바야흐로 전기는 권력이자 안보다. 자본의 가장 강력한 형태다. 각국이 국가 시스템을 전력 중심으로 뜯어고치는 이유다. 유럽은 가스관 차단만으로 경제가 흔들리는 현실을 경험했다. 에너지 의존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즉각 에너지 주권을 국가 전략 최상위에 올렸다. 미국은 낡은 전력망 탓에 대규모 정전과 산업 차질을 반복한다. 바이든 정부가 '전력 인프라 재건'을 국가 과제로 삼고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는다. 아세안 국가들은 송배전망 연계와 전력시장 통합을 서두른다. 전기는 이제 내수 문제가 아니다. 외교이자 국방이다. 특히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은 차원이 다른 전력을 삼킨다.
에너지는 곧 안보다. 지정학적 위험과 공급망 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은 국가의 생존 과제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서 에너지 안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였다. 재생에너지 시대라고 다르지 않다. 화석연료 없이 태양과 바람으로 에너지를 만든다 해도 그 이면의 공급망 리스크는 여전하다. 값싼 중국산 태양광의 공습은 국내 생태계를 초토화했다. 전 세계 태양광 시장을 장악한 중국산은 이제 단순한 시장 논리를 넘어 시스템 리스크로 진화했다. 새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기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국내 재생에너지 산업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선 값싼 중국산과 경쟁할 수 있도록 미국의 첨단제조세액공제(AMPC)와 같은 강력한 보조금 정책이 필요하다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불편한 진실은 밸류체인 전체가 중국에 잠식됐다는 점이다. 태양광 산업은 '폴리실리콘→잉곳/웨이퍼→셀→모듈'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가 핵심이다. 폴리실리콘으로 잉곳을 만들고, 그 잉곳을 얇게 잘라 웨이퍼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