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상 제 집(관사) 주소를 물었을 때도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아 당황했었죠."
최근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이 한 말이다. 내년부터 새 주소로 쓰일 도로명주소가 익숙지 않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오죽하면 주무부처 수장까지 이런 하소연을 했을까.
정부가 도로명주소(도로명+건물번호) 도입을 처음 결정한 것은 17년 전인 1996년 7월이다. 기존 지번주소 체계가 일제 강점기 토지수탈과 조세징수를 목적으로 만들어져 일제 잔재 청산의 의미가 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도로명주소가 대세인 국제 기준과도 부합, 물류산업 발전과 응급구조기관의 현장 대응력이 제고되는 등의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당장 새 주소를 사용해야 하는 국민이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존의 지번 주소가 친숙한 탓이다. 실제 11월말 기준으로 전국 우편물의 도로명주소 평균 사용률은 17.7%에 불과하다. 본인이 거주하는 집의 도로명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다.
도로명주소 사업엔 그 동안 4000여억원이 투입됐다. 세부내역은 도로명판·건물번호판 설치 등의 사업비 3415억원, 공적 장부 주소 전환 등의 정보화사업비 254억원, 대국민 홍보비 237억원 등이 쓰였다. 그럼에도 17년 준비기간에 막대한 돈을 들인 도로명주소가 '계륵'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것은 누구 탓인가.
힘들여 홍보한 안행부도 답답하기만 하다. 공공기관을 제외하고는 도로명주소 사용을 의무화할 수 없어서다. 실제로 민간 분야는 옛 주소와 새 주소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 불편을 호소하는 고객들의 민원이 쉼 없이 쏟아질 도로명주소 전환을 민간 기업에 강제하긴 어려운게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도로명주소의 민간 활용률을 4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물론 100여년 만의 주소 체제 개편이 한 번에 안착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공공기관에서만 쓰는 반쪽자리 주소를 국민과 기업에게 무조건 쓰라고 강요하는 것도 정부의 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금부터 "새 주소 체계는 번거롭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국민의 목소리에 정부가 좀 더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