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코트디부아르 내전 종식의 주역 최영진 유엔 특별대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07년 10월 최영진 전 유엔대표를 코트디부아르 유엔특별대표에 임명하면서 "동아시아 사람이 이 일을 맡는 것은 당신이 처음이다. 실패는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Failure is not an option)"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3년, 그는 반 총장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지난해 12월 대선결과에 불복해 변란을 일으킨 로랑 그바그보의 끊임없는 살해위협에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며 냉정한 판단과 특유의 뚝심으로 임무를 완수해냈다. 한국인이 글로벌 분쟁 해결사로 나서 성공까지 이뤄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잠깐 짬을 내서 뉴욕에 온 그를 22일(현지시간) 저녁 특파원들이 어렵게 만났다. 그바그보 체포로 큰 짐을 던 듯 그는 다소 여유있고 상기된 얼굴로 특파원을 대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그바그보 체포까지의 긴박했던 시간과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아찔한 순간에 대한 뒷얘기들을 털어놨다.
코트디부아르는 반 총장이 아프리카 민주화 시범사례로 만들기 위해 매우 공을 들인 곳이다. 유엔이 선거결과를 인증, 정권교체가 일어나기는 동티모르, 네팔에 이어 3번째다.
최 특사는 임무를 맡기전 유엔사무국 평화유지활동(PKO) 담당 사무차장보, 유엔주재 한국대사를 역임했다. 반 총장이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할 때 차관을 지낸 사이이기도 하다. 게다가 최 특사가 프랑스 파리에 유학, 프랑스어에 능통해 반총장에게 '코트디부아르에 딱' 인 적임자로 다가갔다.
4월11일 그바그보 체포까지 마지막 3주는 그에게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그바그보군의 계속되는 저격 행위에 작전수행 외에는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유엔평화유지군 사무실과 지하벙커에서 생활했다. 그바그보쪽에서 물과 식량 공급선을 모조리 끊은 통에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바그보군은 유엔관련 인사들 집을 일일이 방문, 출국을 종용하고 자동차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바그보는 체포 일주일을 남겨놓고는 유엔사무실에서 지근거리 언덕에 있는 대통령 궁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 매일 총질을 가했다. 최 특사는 "한번은 사무실 회의중 날아온 총알이 알루미늄 섀시를 관통 한뒤 벽에 맞고 다른 벽에 있던 지도에 가서 박혔다"고 아찔한 순간을 회고했다. 다음은 뉴욕특파원과 최 특사와의 일문일답.
- 사무총장 특별대표로서 유엔평화유지군을 이끌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 유엔대표로서 중립성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었다. 그바그보는 물론 와타라쪽도 거들 수 없었다. 와타라 체포 직전 와타라군에서 공동작전을 제안한 적이 있었으나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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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평화유지군은 글자그대로 평화유지가 주임무다. 그래서 행동제약이 많다. 공격은 할 수 없고 공격받았을때 방어만 가능하다. 무기도 기관총, 대포 등 중화기는 휴대할 수 없다. 선제공격 하고 싶은 때가 있었지만 꾹 참았다.
활동중 민간인 사상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되었고 수도 아비장이 파괴되는 일도, 그바그보가 죽는 일도 없어야했다. 그 3가지 함정을 비켜갔다. 만약 그바그보가 사망했더라면 참으로 난처했을 것이다.
그바그보는 민주투사로 자처하며 '선거에서 이겼는데 선거후 유엔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자신을 죽이고 와타라를 대통령에 옹립하려한다'고 선전해왔다. '칠레 대통령 아옌데 처럼 죽겠다' 고도 맹세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전사했다면 순교자로 인식되고 말았을 것이다.
- 그바그보 체포는 유엔평화유지군이 아닌 코트디부아르 주둔 프랑스 부대 리콘(Licorne)이 맡았다. 그렇게 된 경위를 소개해달라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른 2차공격때 유엔만 먼저 공격하라는 주문이 많았지만 반대했다. 공격하면 전쟁이 돼 많은 인명피해가 날 수 있다는 점과 유엔군이 정밀 공격능력이 없는 점을 고려했다.
유엔군의 허술한 공격능력으론 인가와 밀접한 대통령 궁을 공격했을 때 민간인 사상이 많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정밀공격 능력을 갖춘 리콘의 협조가 필요했다. 나의 주장을 반 총장께서 적극 지지해주셨다.

- 그바그보가 막판 자충수를 많이 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체포작전이 개시되기까지 긴박했던 상황을 소개해달라.
▶ 그는 3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첫째, 민간인 살상이다. 3월초 와타라측에서 주부를 동원해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는데 기관총을 사용해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시장에다 대고 박격포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둘째 와타라 대통령 당선자가 머물고 있던 골프호텔을 박격포로 공격했다. 셋째, 각국 대사관을 습격했다. 3월말 리베리아 용병과 극렬분자를 동원해 일본 대사관에 침입, 4명을 살상한 것을 시작으로 4월초 한국, 인도 등 대통령 관저 주변에 몰려있던 대사관을 연이어 공격했다.
그바그보가 중화기로 민간인과 외교공관을 잇따라 습격하자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거, 4월4일 그바그보에 대해 1차 군사공격을 개시했다. 정밀 유도공격능력이 있는 리콘이 대통령궁과 사저를 맡고, 유엔군은 군사기지 공격을 맡았다.
작전 4일간 피습당한 대통령 관저 주변 대사관직원을 구출하고 여타 대사관 직원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그바그보군은 다단계로켓포 기지가 파괴되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이틈을 타 와타라 군이 아비장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힘을 잃은 후에도 그바그보는 용병과 친위대에 의지한채 극렬하게 저항했다. 이에 10일 오후5시 2차공격을 개시, 11일 새벽 그바그보를 체포했다.
- 4월 유엔평화유지군의 공격작전은 이례적인데
▶ 3월30일 그바그보 중화기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도 좋다는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른 것이다. 소말리아를 제외하고 유엔평화유지군이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공격을 개시한 것은 처음이다.
공격때 인근 리베리아에 있던 우크라이나의 공격용 헬리콥터가 3대가 사용됐다. 유엔군 공격능력이 없어 우크라이나와 협상끝에 수송해놨던 것이다. 지금와서 보면 그바그보가 공군력이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 체포된 그바그보의 신병처리는 어떻게 되나
▶ 그바그보는 아비장 북쪽 도시로 이동, 가택연금중이다. 내부 경호는 와타라쪽이, 외부경비는 유엔이 맡고 있다. 앞으로 와타라 대통령이 그에 대한 사법절차에 착수할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쟁범죄와 반인륜범죄 혐의로 예비조사에 착수했다.
- 그바그보를 만난 적이 있는지
▶ 체포된 직후인 12일 골프텔에서 만났다. '형이 확정될때까지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를 해주겠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말하더라. 그는 리콘에 의해 대통령 관저 지하 벙커에서 체포된 후 와타라 대통령 당선자가 머물던 골프호텔로 압송됐다.
대통령 선거 직전엔 그바그보가 인심좋은 젠틀맨으로 기억한다. 나를 유엔특사중 최고라고 치켜세울 정도로 관계가 좋았다. 그런데 선거에서 지고 난 후 돌변했다. 아마 자기가 선거에서 이길 것이라고 자신했던 모양이다.
- 생사고비를 많이 넘나들었다고 들었다. 작전중 죽음을 직감한 순간은 언제였나.
▶ 두어번 죽을 뻔 했다. 가장 최근일은 4월6일이다. 와타라측에서 급히 SOS가 왔다. TV방송국을 점령했으니 외곽경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OK하고 장갑차 3대를 앞세우고 나를 포함, 유엔 대표단은 방탄차 2대에 나눠타고 현장에 갔다. 장갑차 2대를 방송국에 떨구어 놓고 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는 와타라군이 한명도 없었다. 방송국을 점령못한 것 같았다.

아차하며 발길을 급히 돌려 오는데 앞서가던 장갑차에서 불똥이 튀었다. 매복중이던 그바그보군이 기관총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옆에 탔던 경호원들이 갑자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탄 방탄차가 그때 그바그보 매복군이 쏜 기관총알은 방어할 수 없었다.
그 때 천우신조인지 와타라 군이 도착했다. 유엔군과 와타라군이 거의 동시에 응사, 내가 탄 차에 대한 그바그보군의 사격이 멈췄다.
그전은 1월11일로 기억한다. 아비장 북부 한 도시에서 그바그보군과 와타라 군이 접전, 그바그보 군이 대패했다. 그날 저녁 복수를 결심한 그바그보가 통금을 내리고 특수부대와 용병을 투입했다. 순찰대로는 안되겠다는 현장보고에 민간인 희생을 막기 위해 군대를 모아 내가 직접가기로 했다.
그러나 병력이 너무 적었다. 총동원한게 장갑차 8대가 최대였다. 하는 수 없이 푸른 색 유엔 헬멧에 방탄조끼를 입고 부대원과 함께 현장으로 갔다. 도중 그바그보 특수부대와 3번이나 맞딱뜨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바그보 특수부대가 공격하지 않았다. 덕분에 밤 12시30분에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중심가로 진입, 새벽5시까지 참사를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