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저축은행 예금자와 후순위채권 보유자의 피해를 소급해 보상해 주는 법안이 9일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 지난해 한차례 '포퓰리즘' 논란으로 무산된 법안이지만 여야는 총선을 코앞에 두고 이를 재추진했다. 정치권이 금융시장 질서는 안중에도 없이 '표'만 의식해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이날 법안심사소위원회와 전체회의를 잇따라 열어 '부실저축은행 피해자 지원 특별조치법안'을 처리했다. 법안은 2008년 9월 이후 영업 정지된 18개 저축은행 예금주와 후순위채권 보유자에 대해 피해액의 55% 이상을 보상하도록 명시했다. 개별 보상금은 피해자의 피해액과 연령, 학력, 재산상황 등을 고려해 결정하기로 했다.
보상비율이 55%라면 총 보상액은 1000억 원 안팎이 될 전망이다. 이 돈은 예금보험공사에 '부실저축은행 피해자 보상기금'을 만들고 여기에 예보의 상호저축은행 구조조정 특별계정 출연금 등을 투입해 마련할 계획이다.
부실 저축은행 피해자 보상은 지난해 4월 이진복 새누리당 의원이 예금, 후순위채권 전액을 보상하는 내용의 법안을 내면서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만 해도 소급입법 소지가 있는데다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처리될 것이라고 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부산 지역에 몰려있고, 부산이 19대 총선에서 최대 격전지로 떠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유사 법안이 잇따라 제출되고 논의가 본격화된 것이다. 여야는 법을 위반한 조치라는 당국의 거센 반발을 "저축은행 사태에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뒷짐만 지고 있다"고 일축했다.
지난해 10월 정무위 법안소위에서는 예금보장 한도인 5000만 원을 초과하는 예금액에 대해 1000만 원까지 전액 보상하고, 그 이상의 예금과 후순위채권 투자자의 피해도 일정 부분 보상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퓰리즘' 논란이 거세게 일자 법안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치권이 4·11 총선을 앞두고 이번 회기에서 다시 법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에서 피해자 보상 기금에 정부가 직접 자금을 투입하는 방안은 삭제됐다. 하지만 '국민 혈세를 투입 한다'는 논란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기금 출연으로 상호저축은행 구조조정 특별계정이 부실해진다면 계정에 정부 출연금을 투입할 필요성이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예금자보호법은 상호저축은행 구조조정 특별계정에 정부가 자금을 출연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무엇보다 예금 피해액을 소급해 보상하는 선례를 남기게 됨에 따라 사실상 '예금자보호 한도 5000만 원'이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금융권 전문가는 "비슷한 금융사고가 생겼을 때 무조건 떼쓰면 국가 재정에서 도와줄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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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마지막까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이날 정무위 전체회의에서 "정부로서는 그동안 현행법 테두리에서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혀 왔다"며 "예금보장제도의 취지라든지 채권자 평등 원칙, 자기 투자 책임 원칙 등 여러 금융시장 기본 질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정무위 전체회의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법안이 또 하나 처리됐다. 신용카드사에 수수료율 인하를 강제할 수 있도록 하는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업종별로 최고 4.5%에 달하는 수수료율은 1%대로 낮아지겠지만 민간 시장에서 결정돼야 할 가격을 정부가 직접 강제한다는 점에서 '과잉규제'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 전직 고위관료는 "선거를 앞두고 국회가 무책임하게 터무니없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금융당국은 예금보호가 되니 마음 놓고 저축은행 구조조정도 할 수 있고, 국가가 나서 새우깡 가격까지 다 정해줄 판이니 기업 역시 걱정 없겠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