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일제 잔재 벗어나자는 주장이 일본식 탈아입구(脫亞入歐) 못벗어난 발상"

올해 전면 시행된 도로명주소로 인해 국민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바뀐 도로명 주소를 모르고, 행정부처와 유관기관에서도 시행과정에서 손발이 맞지 않고 있다.
안전행정부는 도로명주소를 전면시행한지 두 달밖에 안됐으니 지켜봐달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문제가 확실해 보이면 초기에 고쳐 쓰는 게 낫다. 문제점이 한 둘이 아닌데 버티다가 나중에 고치려 들면 그만큼 국민은 불편하게 되고 행정비용의 허비도 커지게 된다.
우선은 괄호 안에 보조적으로만 쓸 수 있는 동 이름이라도 추가해서 쓰도록 하면 어떨까 한다. 현재의 체계로는 주소의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다. 동이 있으면 위치를 가늠할 수 있지만 동 이름이 없이 무슨 무슨 대로니 길이니 해봐야 오리무중이다.
전면시행 된 것은 `법적 주소`이고 사적인 생활관계, 택배, 우편 등에선 기존 지번주소를 당분간 써도 되는데 정부는 제도정착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법적 주소를 쓰지 않으면 마치 과태료라도 내야하는 것처럼 홍보하고 있는 것도 고쳐야 할 점이다. 국민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행정 우월만 내세우고 있다.
이 사업의 원래 취지는 법적 주소 교체는 너무 혼란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길 찾기에 편리하도록 별도의 생활주소로 보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들어 도로명 주소 사업에 쏟아부은 3000억원에 대해 예산낭비라는 비판이 높아지자, 당시 행정안전부는 오히려 입법을 통해 도로명주소를 아예 `강제`하자는 행정편의적 발상을 해 버렸다. 결국 당시 여당의원에 의해 2005년 `도로명 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이 대표발의됐고 이듬해 제정 공포됐다. `국민이 함께 참여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던 참여정부가 오히려 국민의 참여를 봉쇄한 셈이다.
국민을 충분히 설득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행정편의만을 생각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도로명주소는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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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체계는 다음 세대를 위한 백년대계인 만큼 당장 시행을 강제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난 100년간의 우리의 사고체계를 통째로 바꾸는 사업인 만큼 바른 방법으로 차근히 제대로 다듬어 가야 한다.
도로명주소에서 동 이름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사라지게 만든 점도 간과할 수 없는 큰 문제다. 예를 들어 마장동, 역삼동 등의 동 이름은 말과 관계가 있는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 이를 왜 없애겠다는 것인가. 역사와 문화는 통째로 없애버리고 크리스탈로, 사파이어로 등 지역특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보석이름을 갖다 붙인다고 그 지역이 보석처럼 반짝이겠는가.
길 찾기를 쉽게 하겠다는 게 사업의 주된 목표지만, 1990년대 중반 이 사업이 시작될 때와 지금은 길 찾기 환경도 다르다. IT의 발달로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는 시대다. 예전에 처음 이 사업을 기획한 관계부처가 십 수 년 뒤 지금과 같은 스마트한 환경이 펼쳐질 거라 예상했다면 아예 처음부터 이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모두가 도로방식 주소체계를 운영한다며 이에 따르지 않으면 후진국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전한다.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일본은 도로명주소를 강제하지 않고 지자체별로 기존 지번주소와 선택적으로 병행해 쓸 수 있게 하고 있다. 일시에 바꾸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존 지번주소가 일제의 잔재라며 서구 선진국의 주소체계를 따르자는데, 그런 주장이야말로 일제의 잔재인 일본식 탈아입구(脫亞入歐) 세계관을 못 벗어난 발상이다.
영미가 왜 도로명주소를 쓰게 됐는지부터 짚고 가자. 영국은 17세기 런던대화재 이후 도시를 전면 재설계해야 하는 과정에서 도로명 주소를 쓰기 시작했다. 미국은 영국식민지로 시작했기에 태생부터 도로명에 익숙했고, 넓은 땅에 도로가 생기고 거기에 도시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도로명으로 주소체계를 만든 나라다. 다 역사적 배경이 있고 우리의 역사적 배경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역사가 만들어 놓은 큰 유산인 동 이름을 버리는 방향으로 가려하고 있으니 큰 잘못이다.
도로명 주소가 다음 세대를 위한 제대로 된 투자라면 당연히 현 세대가 감수할 몫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혹 그렇다 하더라도 강요하지 말 것이며, 불편한 점은 고쳐서 제대로 써야 한다. 동 이름이라도 우선 살려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