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 100주년]②

1926년 6월10일 순종 인산일(장례식). 검은 상복 물결로 뒤덮인 경성 한복판에서 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은 소매 속에 숨겨둔 격문(檄文)을 허공에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종로 일대는 순식간에 만세 함성으로 뒤덮였다.
6·10 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한 항일 시위로 기억되지만 역사학계에선 학생 운동을 넘어 사회주의·민족주의 계열이 처음으로 연대한 '연합전선' 성격의 독립운동으로 평가한다.
10일 머니투데이 특별취재팀이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확보한 조선총독부 문건 '조선에 있어서의 동맹휴교의 고찰'(1929년) 역시 이런 시각을 뒷받침한다. 문건에 따르면 일제는 당시 6·10 만세운동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기획한 조직적 항일투쟁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1926년 6월10일 오전 6시 창덕궁 돈화문 앞에는 순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십 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 인파가 경성에 집결하자 조선총독부는 군인과 경찰로 구성된 경비 병력을 대거 배치했다.
오전 6시30분 순종의 유해를 실은 대여(상여)가 돈화문을 빠져나오며 장례 행렬이 시작됐다. 약 두 시간 뒤 행렬이 단성사 앞(현재 종로3가)에 도착하자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 학생 이선호의 신호와 함께 숨어 있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생들은 소매 속에 감춰둔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학생들까지 시위에 호응하자 시민들도 하나둘 합세했고 종로 일대는 거대한 만세 시위 현장으로 변했다.
만세운동은 장례 행렬을 따라 경성 전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오전 9시 청계천 관수교 부근에서는 사립학교 연합 학생들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이 격문을 살포했다. 행렬이 훈련원 일대에 이르자 경성대(현 서울대),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 학생들도 시위에 가세했다.
상여가 동대문을 지나 성 밖으로 향하던 정오 무렵까지도 만세 시위는 이어졌다. 일제 기마대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강제 진압에 나섰지만 협성학교와 경성공업학교 학생들까지 합류했고, 상여가 장지인 유릉(경기 남양주시)으로 향하기 위해 청량리를 빠져나갈 때까지도 거리 곳곳에선 만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독자들의 PICK!
일제는 만세운동이 시작되자마자 무력으로 대응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기마헌병과 무장 경찰을 투입해 시위 참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체포했고, 당일에만 중앙고보 이선호·이동환, 연희전문의 권오상·한일청 등 학생 200여명이 검거됐다. 학생 간부와 배후 인물 등을 포함하면 총 1000여명의 조선인이 연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6·10 만세운동은 대중운동으로서 청년·학생이 참여해 규모면에서는 3·1 운동에 비해 작지만, 대중운동으로서는 상당히 손꼽을 만한 사건"이라며 "대중적인 차원에서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고 우리 민족의 의지를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6·10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고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조직이 빠르게 와해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학계에선 3·1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 사이에서 민중 독립운동의 흐름을 이어간 결정적 연결고리로 평가한다.
특히 6·10 만세운동의 핵심 성과로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공산당과 민족주의 계열인 천도교, 학생 단체들이 이념을 넘어 힘을 합쳤다는 점이 꼽힌다. 이들은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제작해 전국적 만세 시위를 준비했고 순종 국장을 거대한 항일 시위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거사 닷새 전 일제 경찰이 천도교 중앙총부 본관을 급습하면서 계획은 크게 흔들렸다.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만장이 압수됐다. 핵심 주동자인 권오설(權五卨)도 체포됐다. 상하이에서 들여오던 격문까지 경성역에서 적발되면서 사회주의·민족주의 진영이 추진했던 조직적 연대에도 큰 타격이 가해졌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남아 있던 학생 조직은 자체적으로 인쇄한 격문 수만장을 확보해 6월10일 거사를 강행했다. 결국 6·10 만세운동은 사회주의·민족주의 진영의 기획 아래 학생들이 거리에서 행동에 나선 항일운동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전명혁 동국대 연구교수는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더불어 3대 의거로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대중들한테는 알려지지 않았다"며 "6·10 만세운동은 사회주의·민족주의 계열이 연대해 이듬해 '신간회'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운동"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