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속오늘
과거의 오늘, 뉴스가 전한 다양한 사건과 감동의 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이슈와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세요.
과거의 오늘, 뉴스가 전한 다양한 사건과 감동의 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이슈와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세요.
총 1,119 건
"아임 쏘리, 아임 쏘 쏘리(I'm sorry, I'm so sorry)" 2019년 10월18일, 잃어버린 5살 딸과 44년 만에 마주한 어머니 한태순(이하 당시 나이 67세)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중년이 돼 돌아온 딸 신경하(미국명 라우리 벤더·49)씨는 한씨의 얼굴을 한번에 알아봤다. 모녀는 상대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얼굴은 똑 닮아 있었다. 한씨는 딸을 품에 안고 "안아보니까 내 딸이 맞았어 얼굴을 대보니까 내 딸이 맞았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며 "꼭 부모를 찾아달라 당사자가 나서지 않으면 부모는 찾을 방법이 없다"고 호소했다. ━사라진 딸…1만여㎞ 떨어진 미국서 찾았다━신씨는 1975년 5월9일 실종됐다. 한씨는 당시 집에 신씨를 두고 잠시 시장에 다녀왔는데, 신씨가 보이지 않았다. 한씨는 신씨가 혼자 친가에 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평소에도 종종 친가에 혼자 다녀왔던 만큼, 곧 돌아올 줄 알았지만 이튿날이 돼도 신씨는 돌
2019년 10월 17일. 직장 선배의 약혼녀를 성폭행한 뒤 잔인하게 살해한 30대 정모씨의 선고기일이었다. 앞서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결과는 무기징역. 이날 재판부는 정씨에게 △40시간 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10년간 신상정보 공개 △10년간 아동·청소년 관련 복지시설 등 취업제한 명령도 내렸다. ━성폭행 전과 2범 정씨…출소 7개월 만에 저지른 끔찍한 만행━ 사건은 2019년 5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자정쯤 정씨는 그의 자택에서 직장 선배 A씨와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던 중 A씨와 말다툼을 벌였고, 술병으로 폭행했다. 이후 정씨는 지쳐 쓰러진 A씨가 잠들자 오전 5시 50분쯤 A씨의 약혼녀 B씨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그는 현관문을 두들기며 "A씨가 큰일을 당했다. 문을 열어달라"라고 말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돌변한 정씨는 B씨를 덮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잠시 정신을 잃은 B씨는 끝까지 저항하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6층에서 떨어졌다
1998년 10월 16일. 대구 계명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여대생 정모(당시 18)씨가 실종 하루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그는 학교 축제에 참석했다가 밤 10시 40분쯤 귀가하던 중 돌연 사라졌다. 이후 정씨가 발견된 것은 실종 하루 만인 17일 새벽 5시쯤 대구 구마고속도로(현재 중부내륙고속도로) 하행선 7.7㎞ 지점이었다. 고속도로 주변엔 공장들 뿐이었고 집이나 학교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당시 119구조대원이 "새벽 시간에 학생이, 주변이 공장 지역인 데 가로등도 하나 없는 곳에 어떻게 왔을까"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외진 곳에서 발견된 정씨 사망 원인은 단순 사고였다. 고속도로를 지나던 25t 덤프트럭에 치인 것이다. 당시 트럭 기사는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던 행인을 치어 사망하게 했다며 119에 신고했다. 그런데 유가족은 정씨 죽음을 단순 교통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에 치여 숨진 정씨가 속옷 없이 바지만 입고 있어서다. 정황상 성폭행이나 다른 범죄 피해를
"유전무죄! 무전유죄!" 1988년 10월 15일, 지강헌 일당 4명이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모씨 집에 잠입해서 고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지강헌은 그해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25명 중 12명과 함께 집단 탈주하고 서울 시내로 잠입해 인질극을 벌이다가 경찰이 쏜 총에 사살당했다. 560만원가량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 등 17년 옥살이를 하는 반면, 70억원 이상을 횡령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는 겨우 7년(1991년 가석방)을 선고받은 것을 탈출 이유로 들었다. 그는 인질극을 벌이며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라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발언을 했다. ━교도관 흉기로 찌르고 탈주…흉악범이 된 잡범━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교도소, 공주치료감호소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해 서울 시내로 잠입했다. 당초 이들은 잡범이었으나 교도권을
2018년 10월14일 아침 서울 강서구의 한 PC방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20대 아르바이트생, 가해자는 손님 김성수(당시 29세)였다. 흉기에 무참히 찔린 피해자는 병원에 이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도심 한복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국내가 들썩였다.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100만명이 넘는 참여자가 모였다. 또한 피의자의 상태가 심신미약인 경우에도 판사 재량에 따라 형 감경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른바 '김성수 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무려 80여회 찔렀다"…말다툼 뒤 일어난 '살인사건'━ 당시 김성수는 동생을 따라 해당 PC방에 방문했다. 그러다 오전 7시33분쯤 김성수와 피해자 간의 다툼이 시작됐다. 자리를 치워달라 요구했지만, 아르바이트생이 제대로 정리해주지 않았고 게임비도 환불해주지 않아서 싸움이 시작됐다는 것이 김성수 측 주장이다. 김성수의 동생과 피해자는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었고, 얼마 뒤 경찰이 PC방에 도착했다.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1971년 10월 13일, 수학여행을 가던 초등학생 19명 등 총 20명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다. 당시 열차에는 전라북도 남원역 구내에서 군산역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232명의 학생을 포함해 통학생, 시민들이 타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한 여행은 학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선행 열차, 뒤로 미끄러지며 후발 열차 들이받아━ 사고가 발생한 열차는 순천발 용산행 192호 보통열차다. 남원역에서는 이 열차가 오전 6시 40분에 출발했고, 7시 16분에 출발하는 후발 유조화물열차가 진입해 정거 중이었다. 이때 남원역에서 1.5km 정도 나아간 선행 192호 열차로부터 '기관차의 기관이 고장 났으니 구조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192호 열차를 구조하기 위해 직원들이 후발 유조화물열차의 기관차를 유조탱크와 분리하려는 찰나, 192호 열차의 기관차 제동장치가 풀리며 뒤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192호 열차는 남원역으로 돌진했
8년 전인 2016년 10월 10일 밤 10시쯤 국내 최고 상아탑인 서울대학교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재학생 1000여명이 한밤중 대학본부에 진입해 4층 총장실을 점거한 것. 당시 서울대 학생들은 오후 6시부터 관악캠퍼스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 광장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철회'를 목표로 대학본부 점거를 결정했다. 학생총회 참석자 1900여명 가운데 1097명이 '대학본부 점거 투쟁'에 찬성했다. 점거 사태 약 2개월 전 서울대는 경기 시흥시, 한라건설(배곧신도시 지역특성화 사업자)과 시흥캠퍼스 조성을 위한 실시협약을 체결했다. 이를 두고 학생들은 "대학의 기업화만 가속할 뿐 아무런 교육적 비전이 없다"며 "학생 구성원 의견을 배제한 비민주적 사업 추진"이라고 반발했다. 대학본부 점거라는 강수를 둔 학생들은 100~150명 규모의 인원을 남겨두고 밤샘 농성을 이어갔다. 이들은 시흥캠퍼스 추진 철회가 이뤄질 때까지 무기한 농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설득 실패하자
12년 전인 2012년 10월 8일 경찰은 김종석(당시 43세)이란 이름의 한국인이 필리핀의 한 유치장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유치장에서 숨진 김종석은 2007년 7월 최세용, 김성곤과 경기 안양시 한 환전소에서 20대 여직원을 살해한 뒤 1억8500만원의 현금을 빼앗아 필리핀으로 도주한 살인범이었다. 경찰은 필리핀 수사 당국과 공조해 2012년 10월 5일 김종석을 검거해 유치장에 가뒀다. 필리핀에서도 한국인 관광객을 납치 및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른 김종석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검거 사흘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종석은 필리핀 경찰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노려 평소 자신이 가지고 다닌 가방끈을 이용해 천장에 목을 맸다. 그는 현장에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5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나 후회는 없다", "예쁜 딸이 얼굴만큼 마음도 곱고 착했으면 좋겠다" 등 내용이 적혔다. 경찰청 관계자는 "고인의 손목에서 칼에 의한 주저흔이 나왔고, 체포에 앞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2014년 10월 7일, 서울 대표 부촌으로 꼽히는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단지에 근무하는 50대 경비원 이 모 씨(당시 53세)가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분신자살을 기도한 것. 현장에서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이 씨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받았지만 한 달 후 결국 사망했다. 이 씨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입주민 차 안에서 몸에 시너 뿌린 뒤 불붙여━ 이 씨는 이날 오전 9시30분께 강남구 압구정동 S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세워진 그랜저 차 안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입주민들이 자신에게 맡긴 차량 열쇠 중 하나를 골라 그랜저 차량에 탑승, 자기 몸에 시너를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분신 직후 한 입주민이 차량에 불이 난 것을 보고 119에 신고했고, 동시에 다른 경비원들이 소화기를 들고 와 이 씨 몸에 붙은 불을 껐다. 이 씨는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씨는 사건
"원 모어 씽(One more thing)" 13년 전인 2011년 10월 5일(현지 시각) 애플 신제품 발표 행사에서 모두를 환호케 했던 이 한마디의 시작이었던 애플 창업자이자 '아이폰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티브 잡스(Steven Jobs)가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원 모어 씽'은 '하나만 더'를 의미한다. 1999년 잡스가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애플의 상징과도 같은 문구다. 생전 잡스는 제품 발표 행사 말미에 마무리 발언 후 행사가 끝난 것처럼 행동하다 돌아서며 늘 이 말을 외치곤 했다. 이런 그가 병마와 다투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췌장암 진단을 받으면서다. 조기 진단받았지만 잡스는 대체의학으로 9개월이나 수술을 거부했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하자 2004년에서야 종양 제거 수술을 했다. 하지만 암이 재발한 데 이어 간까지 전이됐고 간이식 수술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잡스는 2011년 8월 애플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나는 결정을 내렸고 그로부터 3개월도
2007년 10월 4일 북한 평양시 백화원 영빈관에서 대한민국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커다란 테이블에 서로 마주 앉았다. 서명을 마친 두 사람은 웃으며 악수했고 맞잡은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상호존중과 신뢰' '평화' '협력'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위원장은 이날 위 세 단어가 담긴 '10.4 남북공동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했다. 김대중 정부가 남북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발표한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로 약 7년이 흐른 뒤다. ━"금단의 선 넘는다"…돌아보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는 △이산가족 상봉 △장관급 회담 △경제협력 등으로 발전해나가는 듯했으나 크고 작은 시련을 겪었다.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고 2003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또다시 탈퇴했다. 2006년에는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는 등 정치적 긴장 상태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1988년 9월 29일.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1988 서울 올림픽에서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이날 경기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당시 세계 최강을 꼽히던 소련(소비에트연방)을 21-19로 꺾으며 짜릿한 재역전승을 거뒀다. ━여자 핸드볼, 올림픽 첫 출전에 은메달…우승 위해 500일 스파르타 훈련━비인기 종목이었던 한국 여자 핸드볼이 무관심의 설움과 역경을 딛고 이뤄낸 결과였다.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 것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였다. 그러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로 당시 미국, 일본 등과 함께 한국 역시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기로 방침을 정했고, 이에 한국 여자 핸드볼팀의 올림픽 첫 출전도 좌절됐다.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이후 4년간 갈고 닦은 실력으로 1984년 마침내 출전한 로스앤젤레스(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