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속오늘
과거의 오늘, 뉴스가 전한 다양한 사건과 감동의 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이슈와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세요.
과거의 오늘, 뉴스가 전한 다양한 사건과 감동의 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이슈와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세요.
총 996 건
5년 전인 2019년 6월 9일. 100만 홍콩인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홍콩의 중국화'를 막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에 반대하는 시위는 이날 정점을 찍었고 새 국면을 맞았다. 103만명(주최 측 추산)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는데 홍콩 시민 7명 중 1명꼴이었다. 이날 시위는 1997년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에 반환된 이후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는 이날 기점으로 대규모로 번졌고 격렬해졌다. 장기간 이어진 시위는 송환법 폐지 요구에 그치지 않고 중국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 운동으로 성격이 달라졌다. 홍콩 경찰은 최루탄에 이어 실탄을 쏘는 등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결국 홍콩 정부는 그해 9월 문제가 됐던 송환법을 철회했다. 하지만 본질은 '중국화 반대'였기에 홍콩의 '불안한 평화'는 계속되고 있다. 시위의 발단이 된 '범죄인 인도법'은 중국 본토와 대만, 마카오 등 홍콩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
2021년 6월9일 오후 4시22분.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의 학동4구역 재개발지역에서 철거 중이던 5층 빌딩 한 채가 차도에 정차해 있던 시내버스를 덮쳤다. 10대를 비롯해 사망자 9명, 부상자 8명을 낸 충격적인 사고였다. 사고 이후엔 건설사와 브로커, 공무원 등의 각종 부정청탁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무너진 건물…피해자 중엔 10대도━ 학동 4구역 주택재개발사업은 2017년부터 학동 633-3번지 일대 12만 6433㎡에 지하 3층, 지상 29층, 19개 동, 2314세대 규모로 추진 중이었다. 시공사인 ㈜현대산업개발이 2018년 2월 주택개발정비사업조합으로부터 4630억9916만원에 사업을 수주했다. 사고가 벌어진 곳은 주택 재개발사업 지역의 근린생활시설 철거 현장이었다. 지상 5층 규모 건물이 무너지면서 왕복 8차선 도로의 5차선까지 덮쳤다. 마치 폭격을 당한 듯 먼지를 풍긴 붕괴 현장을 본 목격자들은 "쾅! 소리와 함께 불과 3~4초 만에 흙더
4년 전인 2020년 6월 8일. 오후 3시 조금 넘은 시각,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 도로에서 79세 여성 환자를 태운 사설 구급차와 택시가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구급차 기사는 택시 기사 A씨(당시 31세)에게 "환자 먼저 병원에 모셔다드리고 오겠다"며 명함을 건넸다. 그러나 A씨는 "죽으면 내가 책임진다"며 막무가내로 구급차의 이동을 막았다. 환자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일부러 사고 낸 뒤…"죽으면 내가 책임질게"━당시 폐암 4기였던 환자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사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이송되는 중이었다. 그런데 구급차가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하던 중 택시와 가벼운 접촉 사고가 발생했다. 구급차 기사는 A씨에게 "환자 이송부터 한 뒤 보험처리를 하겠다"며 연락처를 알렸다. 그러나 A씨는 반말로 "사고 처리가 먼저인데 어딜 가? 119 불러준다고. 내가 책임진다고 죽으면. 119 불러서 보내"라고 소리치며 구급차를 막아섰다. A씨는 구
2021년 6월 7일,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췌장암 투병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향년 49세. 그라운드의 '유비'이자 전 국민을 환호하게 했던 '2002 월드컵의 영웅'이었고, '슛돌이 감독'을 맡으며 누구보다 다정한 면모를 자랑했던 그는 1년 반 이상을 병마와 싸우다 2002 한일월드컵 국가대표 선수 중 가장 먼저 사망했다. 고인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축구장에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을 드러냈기에, 많은 축구팬은 비통한 소식에 눈물을 보였다. 그의 '슛돌이' 시절 애제자였던 축구선수 이강인 역시 "유상철 감독님이 제가 월드컵 뛰는 것도 보시고 좋은 팀으로 이적한 것도 보셨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 마지막으로 감독님을 만났을 때 제 경기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셨는데 건강 때문에 이뤄질 수 없었다. 제가 좋은 축구선수로 크고 있는데 직접 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안타까워했다. ━'골키퍼 빼고 다 가능' 한국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은 단순히 성이 유씨
80년 전 오늘, 1944년 6월6일.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에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독일을 향한 연합국의 반격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영화처럼 극적으로 이뤄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프랑스를 독일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꿨다. 드라마틱한 전개는 영화의 소재로도 쓰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배경이 됐다. ━긴박했던 D-Day, 15만6000명 투입 ━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낳은 전쟁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세계 전쟁으로 번졌는데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구성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진영의 대립으로 진행됐다. 이때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서부 전선에서 오버
2023년 6월 6일, 캄보디아 프놈펜 인근 마을의 한 연못가에서 30대 한국인 여성 인플루언서가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한 인플루언서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약 25만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BJ아영(본명 변아영, 이하 변씨)이었다. 변씨 사체는 발견 당시 붉은색 천에 싸인 채 웅덩이에 버려져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경찰은 천에 묻은 지문을 토대로 중국계 부부를 시체 유기 등 혐의로 체포했다. 이들은 변씨가 수액과 혈청을 맞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사망 전 고인이 직접 주사를 놨고, 변씨가 숨지자 당황해서 시신을 유기했다고도 진술했다. 그러나 시체 상태와 관련해 캄보디아 경찰 측이 성폭행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사건을 두고 여러 의혹이 나왔다. 해당 사건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스토커 때문에 해외 갔다가 참변━ 변씨는 2023년 6월 2일 캄보디아에 입국했다가 이틀 뒤인 4일 피고인들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피살돼 6일 현지 경찰에 의해 발견
"짝짝 짝짝짝! 대~한민국!" 한국 축구가 가장 빛났던 시절, 전설로 기록된 한국 월드컵 4강 신화가 바로 22년 전 오늘 시작됐다. 2002년 6월4일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폴란드와 맞붙어 첫 승전보를 올린 기념비적인 날이다.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48년 만에 거둔 승리의 맛을 바탕으로 한국 축구 대표팀은 전례 없는 드라마를 써 갔다. '한국 축구 역사는 2002년 월드컵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2002년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의 최정점이자, 이후 한국 축구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이벤트였다. 당시 한국 축구 선수들의 활약상이 전 세계에 방영되면서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졌다. 현재 한국 축구계를 이끄는 '월드 클래스' 선수들을 키운 것도 2002년 월드컵이다. 한국 대표팀 주장인 손흥민 선수를 비롯해 기성용, 이청용, 구자철, 황희찬 선수가 2002년 월드컵을 보고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운 대표적인 '월드컵 키즈'로 꼽힌다
60년 전 오늘, 1964년 6월3일. 서울대생을 중심으로 한 1만 여명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박정희 정권의 한일국교 정상화 움직임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반대 시위는 6월3일 절정에 달했기에 '6·3항쟁'으로 불린다. 이 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극렬한 반대 움직임에도 결과적으로 이듬해 한일협정이 맺어져 양국 외교가 정상화됐다. ━한일국교 정상화 추진, 왜?━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과 손을 잡으려 했던 건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속도감 있게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경제건설을 구상한 그는 부족한 자금을 협상을 통해 조달하려 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 진출을 검토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미국은 안정적으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통합전략을 짰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 등을 끌어들여 지역통합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관계 정상화가 먼저였다. 박정희 정부는 중단됐던 한일회담을 재개했고 물밑에서 협상을 이어오다가 1964년 3월 대외
2016년6월3일. 복싱계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가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사인은 파킨슨병의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 그의 나이 74세였다. 알리의 사망에 전 세계는 큰 슬픔에 빠졌다. 조지 포먼, 마이크 타이슨, 플로이드 메이웨더, 매니 파키아오 등 복싱계 스타들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등이 애도의 뜻을 전했다. 프로 통산전적 56승(37KO) 0무 5패. 복싱 헤비급 챔피언 3회.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저 '복싱을 잘했던 선수'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당시 시대상을 비춰볼 때, 링 밖에서 그가 보인 흑인 인권운동가, 외교관, 그리고 사회 복지사로서의 행보는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 4년 만에 세계 챔피언…승승장구하던 무하마드 알리━ 18살에 아마추어 복서로 시작한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참가해 복싱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해 헤비급으로 증량해 프로 데뷔한 그는 무패행진을 이
2019년 6월 2일 저녁. 인천 부평 한 아파트에서 생후 7개월 아이가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아이는 '종이 상자' 안에 물건처럼 담겨 있었다. 부모는 "자고 일어나니 숨져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장시간 방치돼 사망한 진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특히 엄마는 아이는 뒷전인 채 며칠간 술자리를 가진 것도 모자라 아이 사망 사실을 알고도 아무 일 없는 듯 SNS에 글을 남겨 세간에 충격을 줬다. ━상자 담긴 채 죽은 아이…"부모에게 물건이었던 거 같다"━아빠 조모(당시 21)씨와 엄마 견모(당시 18)씨가 연애를 시작한 것은 2017년이다. 이후 견씨가 17살이던 2018년 초 임신했고 동거를 시작해 그해 10월 딸 A양을 출산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부모가 된 이들은 아이는 안중에 없었다. 각자 친구들 만나 놀기 바빴고 특히 조씨의 잦은 외박과 복잡한 여자관계로 견씨와 다툼을 벌이기 일쑤였다. A양 사망 전에도 부부는 다툼을 벌였고 홧김에 둘 다 집을 나갔다. 그렇게 A
삐비비익 삑.."됐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3년 전, 서울대와 구미 연구실 두 곳의 컴퓨터 앞을 지키던 연구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을 IT 강국으로 만든 첫 걸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인터넷이 연결된 날이다. 한국의 인터넷 연결 성공은 동북아의 IT 자존심을 세워줬다. 동시에 일본 등 인터넷 도입이 늦은 국가는 상대적으로 디지털 후진국으로 뒤쳐지는 계기가 됐다. ━세계에서 두 번째, 아시아에서 첫 번째. 시작부터 '빠름 빠름 빠름' ━ 1982년 5월31일은 우리나라에 첫 인터넷이 연결된 날이다. 경북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와 서울대 컴퓨터공학에 있던 두 대의 중형 컴퓨터가 각각 고유 인터넷 주소를 할당받아 데이터를 송수신했다. 인터넷 접속 표준 프로토콜인 TCP/IP 방식으로 이뤄진 첫 인터넷 연결이었다. TCP/IP 방식의 인터넷 연결은 아시아에서 최초, 세계에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다. 처음 인터넷 연결을 했을 때는 글자를 주고받는 정도만 가능했다. 속도
지난 2004년5월31일. 이라크 내 군납업체 가나무역 직원이었던 김선일(34)이 팔루자 인근 지역을 지나던 중 과격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에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약 400㎞ 떨어진 미군 기지 '리브지 캠프'에 물건을 배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김 씨를 납치한 단체는 잔인하기로 악명높은 과격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 뒤늦게 납치 사실을 알게 된 전 국민은 그가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납치된 지 20여일이 지난 6월22일. 결국 그는 팔루자 인근 도로에서 참수된 주검으로 발견됐다. 국민은 큰 충격에 빠졌다. 혹자는 당시를 '대한민국에서 9.11사건 정도 급의 테러가 발생한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전후 이라크… 위험지역에 입국한 청년━ 당시 이라크는 2003년부터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이 그해 4월14일 북부 티크리트 중심부로 진입해 사실상 전쟁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