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속오늘
과거의 오늘, 뉴스가 전한 다양한 사건과 감동의 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이슈와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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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 1995년 1월 17일 화요일 오전 5시 46분. 일본 효고현 아와지섬 북부를 진원으로 하는 규모 7. 3의 강진이 발생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고베 대지진 또는 한신 대지진)'으로 부르는 이 자연재해는 일본 기상청 관측 사상 최초로 진도 7이 기록된 대재앙이었다. 특히 고베 지역은 과거 400년 동안 큰 지진이 없어 '지진 안전지대'로 인식되고 있어 충격이 더 컸다. 일본의 안전 신화에도 심각한 균열을 냈다. 지진 발생 이전까지 일본 사회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고 있었고, 인프라와 기술력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다. 불과 20초의 지진으로 도시 기능이 마비됐고, 일본 사회가 믿어왔던 안전 신화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구조적 전환점이 됐다. 사망자는 6400명, 부상자는 4만3000명이 넘었다. 당시 재산 피해 규모는 10조엔(당시 환율 기준 한화 약 80조원) 정도로 추산됐다. ━20초 만에 무너진 고속도로… '안전 신화'의 붕괴━지진 발생 당시 효고현 남부 지역은 주요 경제권인 '간사이 지방'의 핵심 물류 거점이자 주거 밀집 지역이었다.
조국 광복을 불과 1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16일 차가운 베이징 감옥에서 불꽃 같은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가 마흔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원록으로 6명의 형제 중 차남이다. 1920년 안일양과 결혼한 후에는 백학학원에서 학문을 닦고 교편을 잡았다. 1923년에는 4월 학기에 맞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활약한 노동운동자 김태엽에 따르면 이육사는 당시 흑우회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자 단체 회원이었다. 이육사는 조선인 유학생을 규합해 일제에 대한 투쟁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때 일본을 휩쓴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됐고, 이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조선인이 광기 어린 폭력에 희생됐다. 이육사는 힘없는 식민지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했다. 귀국 후인 1927년 10월 18일 이육사는 대구 조선은행 폭탄 사건에 연루된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 장진홍이 꿀단지에 폭탄을 숨겨 조선은행 대구 지점을 폭파하려한 항일 의거로, 폭탄이 담긴 꿀단지의 필적이 동생 이원일의 글씨체와 똑같다는 억지 구실로 네 형제가 모두 연행됐다.
2007년 1월 15일. 김명호 전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당시 서울고법 민사2부 박홍우 부장판사에게 이른바 '석궁 테러'를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 전 교수는 복직 소송에서 패소하자 "개판 같은 재판"이라며 앙심을 품고 재판장이었던 박 부장판사의 집을 찾아가 석궁을 쐈다. 박 부장판사가 도움을 요청하자 아파트 경비원과 운전기사가 달려와서 김 전 교수를 제압했다. 박 부장판사는 옷을 갈아입은 후 구급차를 타고 서울의료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성균관대 조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하자…학교 상대 소송 ━김 전 교수는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를 거쳐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1년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1993년 수학과 조교수로 재임용됐지만 1995년 10월 부교수 승진에서 탈락했다. 이어 1996년 2월에는 조교수 재임용에서 제외됐다. 김 전 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하자 성균관대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1, 2심에서 연달아 패소했다. 그는 1998년 이민을 떠났고 뉴질랜드와 미국 등에서 무보수 연구교수로 지내다 2005년 3월 귀국했다.
39년 전 오늘, 1987년 1월14일. 전두환 정권 시절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 열사가 경찰 고문을 받다가 22세 나이로 사망했다. 공안당국은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진실이 드러나면서 1987년 6월 항쟁을 촉발했다. ━19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벌어진 일━1980년대 중후반 들어 전두환 정권 탄압과 그에 맞서는 저항은 점점 더 격해졌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으로 수배를 내린 박종운 서울대 학생을 찾기 위해 후배인 박종철 열사를 1987년 1월14일 불법 체포했다. 박 열사를 데리고 간 곳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이었다.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박종운 소재를 추궁하며 폭행, 전기 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극한 고문 도중 박 열사는 결국 의식을 잃고 체포 당일 사망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경찰은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시신을 화장하려 했지만 검찰이 거부했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한 행동을 수상히 여겨 시신 부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시가총액 800조원. ' 1969년 1월13일 '삼성전자공업'으로 첫발을 내디딘 삼성전자가 창립 57년을 맞은 날이다. 자본금 3억3000만원에 임직원 36명으로 시작한 삼성전자는 반세기 만에 글로벌 전자·IT(정보기술) 산업 지형을 바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시가총액은 최근 800조원을 넘어섰고, 임직원수는 약 13만명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2017년 그룹 해체 이후 창립기념일을 '삼성반도체통신 합병일'인 11월1일(1988년)로 변경해 운영 중이다. 1938년 삼성상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삼성그룹은 올해 창립 88주년을 맞는다. ━'경공업→전자산업'…국가 운명 바꾼 삼성전자의 시작━ 1960년대 정부 수출 드라이브 정책 속에 태동해 가전 국산화를 넘어 반도체 신화를 쓰기까지 삼성전자 역사는 대한민국 산업 발자취와 궤를 같이한다. 당시 한국 경제는 경공업 중심 수출 전략 한계에 직면해 있었고 정부는 중화학 공업과 전자 공업 육성을 새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 시기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전자 산업이 장차 한국 장래를 짊어질 핵심 산업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전자 사업 진출을 결심했다.
2018년 1월 11일(이하 현지시간). 볼리비아 라파스 주 티티카카 호수 인근 '태양의 섬'(Isla del Sol)에서 한국인 여성 시신이 발견됐다. 태양의 섬은 볼리비아와 페루 사이 해발 약 4000m 고지대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 남쪽에 있는 섬이다. 잉카의 태양신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신화가 전해 내려와 잉카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졌고,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유명 관광지다. 돌로 덮인 채 발견된 시신에서 한국 여권이 발견됐고, 신원 확인 결과 볼리비아를 여행하던 40대 여성 A씨로 밝혀졌다. 볼리비아 경찰이 실시한 부검 결과, 시신에서는 목, 가슴 등 11군데의 자상(끝이 예리한 물체에 찔린 상처)·창상(피부나 조직이 찢어지거나 벗겨진 상처)과 함께 성폭행 흔적이 발견됐다. 사인은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였다. A씨는 시신 발견 이틀 전인 9일 태양의 섬의 한 호텔에 체크인한 후 다음 날 산책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가족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이후 태양의 섬에 사는 차야(Challa)족 원주민이 코라파타 언덕에서 A씨의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21년 전인 2005년 1월10일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한 간부가 화장실 변기에 대변이 그대로 있다는 이유로 훈련병들에게 남은 인분을 먹도록 강요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피해 훈련병이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언론 등에 제보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발생 열흘 만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가해 간부는 실형을 선고받았고 국방부 장관은 대국민 사과했다. 이를 계기로 군대 내 인권 침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군 전반에 만연하던 구타·가혹행위가 점차 줄어들었고 노후화된 위생 시설이 교체되는 등 병영 문화가 개선됐다. ━변기 물 안 내렸다고…"인분 묻힌 손 입에 넣어라" 지시━사건 당일 오후 3시40분쯤 육군훈련소 제29신병교육연대 11중대 중대장 이모 대위(당시 28세)는 훈련병 숙소 내 화장실 청결 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화변기(수세식 변기)에 인분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이 대위는 전날 소속 중대 훈련병을 집합시켜 화장실 청결 유지 교육을 직접 실시했고, 이날 오전에도 "화장실 배설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사실이 적발될 경우 인분을 먹이겠다"고 한 차례 경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1953년 1월 9일 여객선 창경호가 부산 다대포 앞바다 부근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했다. 창경호는 여수항을 떠나 부산항으로 가는 150톤급 정기 여객선으로 이날도 오후 2시쯤 쌀 400가마를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후 10시 20분쯤 부산 다대포 앞바다 부근에서 갑자기 몰아닥친 강풍과 풍랑을 만나 순식간에 침몰했다. 이 사고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사망자 수가 229명이라고 보도했으나, 실제 사망자수가 330명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 승선 인원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사망자수를 정확히 집계하는 게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셈이다. 승선 인원 중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일치한다. 선장, 선원 3명, 중학생 2명, 군인 1명 등 겨우 7명만 살아남은 것으로 파악됐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자료대한민국사에 따르면 생존 학생 중 1명은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돌연 탁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소리를 돌이켜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선체가 급속도로 경사하기 시작했다"며 "나는 덮어 놓고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2021년 1월 8일. 인천 미추홀구 자택에서 8살 여자아이가 40대 친모로부터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친모는 출생신고도 하지 않고 키우던 딸을 질식해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일주일간 방치하다 119에 신고했다. 친모는 사실혼 관계이자 숨진 딸 친부인 남성이 집을 나가 경제적 지원을 끊자 복수하기 위해 딸을 살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1심 재판부는 징역 25년을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건강상 이유로 감형했다. ━8년간 출생신고 미루다…동거남에게 복수하려 딸 살해━친모 A씨는 2001년 결혼해 자녀 2명을 출산했다. 이후 A씨는 2010년 가출해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로 2013년 동거남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남편 자녀로 등록하기 싫다는 이유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동거남은 여러 차례 출생신고를 요구했으나 A씨는 8년간 미뤘다. 그동안 딸은 어린이집에 다닐 수도,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도 없었다. 의료 혜택도 받지 못했다. 서류상으로 태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교육 당국과 기초자치단체도 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33년 전인 1993년 1월7일 새벽 충북 청주시 우암상가아파트 지하상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금세 2층까지 번진 불길은 1시간여 만에 잡히는가 싶더니 LP가스통으로 옮겨붙었고, 연쇄 폭발과 함께 건물 전체가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 사고로 주민 28명이 숨지고 48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350명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조사 결과 건물 붕괴의 근본적 원인은 화재가 아닌 무리한 설계와 부실 공사로 드러나 전형적인 인재(人災)라는 비판이 나왔다. ━LP가스통에 옮겨붙은 불, 건물 통째로 무너뜨려…━사고 당일 밤 12시40분쯤 우암상가 아파트 지하상가에서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 당국이 진화 작업에 나섰으나 불길이 1층까지 번지면서 주민들은 4층 옥상으로 긴급 대피했다. 일부 상인들은 물건을 꺼내기 위해 지하상가로 몰려갔다. 소방대원 200명이 투입되고 1시간20분 만에 불길이 겨우 잡혔다. 그러나 이때 1층에 있던 LP가스통에 불이 옮겨붙었다. 불에 녹은 비닐 호스를 통해 LP가스가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
3년전 오늘. 새해부터 KTX 열차 사고가 발생해 시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특히 목숨에 위협을 느꼈을 당시 상황이 공개되면서 철저한 원인 규명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도 사고는 일반 도로교통보다 비교적 낮지만 유사시 대규모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 더욱 철저한 안전 대책이 요구된다. ━터널 안에서 쾅… "유리창 깨지고 불꽃 작렬, 죽는 줄 알았다"━2022년 1월5일 낮 12시58분쯤. 서울에서 부산역으로 가던 KTX-산천 제23열차(서울 10시30분 출발) 중 객차 1량(4호차)이 충북 영동군 영동읍 영동터널 인근에서 철로를 이탈했다. 영동터널은 영동역과 김천구미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사고는 영동터널 내 철제구조물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터널 공사를 위해 상행선 선로를 옮기고 자갈을 다지는 작업 도중 궤도차 바퀴가 선로를 벗어나면서 발생했다. 열차가 철로에서 이탈하면서 자갈이 튀어올라 객실 유리창이 깨졌고, 짐칸에 있던 물건이 떨어지면서 승객 7명이 다쳤다.
1989년 1월4일. 17세 여고생 후루타 준코가 끔찍한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 하교 중 납치된 준코는 약 40일에 걸친 고문 폭행으로 인해 결국 숨을 거뒀다. 발견 당시 콘크리트 드럼통에 담겨 있던 그의 시신은 온몸에 구타를 당해 까맣게 변한 모습이었다. 수습을 맡은 형사들조차 구토하게 만들 정도로 훼손된 참혹한 상태였다. 일본에서 발생한 역대 최악의 청소년 범죄임에도 15세~18세의 남성 가해자 무리는 소년법 적용을 받아 사형을 면했다. ━여고생 납치해 집단 강간, 감금시킨 뒤 잔혹한 폭행━ 1988년 11월25일 저녁 8시30분쯤, 일본 사이타마현 미사토시에 있던 주범 미야노 히로시(당시 18세)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후루타 준코를 발견하고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함께 있던 자신의 부하 미나토 신지(17)를 시켜 준코를 넘어트리게 한 뒤 구해주는 척 유인해 호텔로 데려가 강간했다. 히로시는 불량소년 오구라 유즈루(17), 와타나베 야스시(16)를 불러 준코를 집단 성폭행했다. 히로시는 부하 신지의 집 2층에 준코를 감금시키고 다음 날 또 다른 소년 두 명을 데려와 준코를 성폭행할 것을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