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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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정치도 계절에 따라, 나이에 맞게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봄옷으로는 무더운 여름을 견딜 수 없고 여름옷으로는 추운 겨울을 넘길 수 없다. 소년기에 입었던 옷으로 청년기를 지낼 수 없고 청년기 옷으로 장년기와 노년기에 생활할 수 없다. 국가나 정치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정치가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정치제도도 상황과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고쳐져야 올바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이제 갓 독립을 선언한 국가의 정치제도는 새로운 국가로서의 기능을 행사하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경제성장을 급속하게 이룩해야 할 단계에서는 국가제도도 여기에 맞게 마련돼야 한다. 냉전시대의 국가제도나 정치구조는 글로벌 시대에 맞을 수가 없다.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한 지배세력이 권력유지의 관점에서만 제도를 마련하게 되면 잘못 입은 옷이 된다. 우리나라의 국가제도나 정치구조도 시대에 뒤쳐진 낡은 옷을 입고 있는지 살펴 볼 때가 됐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후 3년 간 미 군정기를 지
제5공화국 시절 일이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한 장관이 찾아왔다. "이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각하의 위대한 업적으로 남을 것"이라며 예산 배정을 요청했다. 전 대통령은 반가운 마음에 즉각 특별예산 배정을 지시했다. 얼마 후 전 대통령이 그 장관에게 경과를 물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일이 밀려 그 프로젝트는 아직 손도 못 댔습니다." 전 대통령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둣발로 그 장관의 정강이뼈를 걷어차 버렸다. 전 전 대통령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보스' 기질이 강했던 그는 부하들을 화끈하게 챙겼던 만큼 화가 날 때도 물불을 안 가렸다. 같은 군인 출신이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달랐다. 화가 나도 웬만하면 속으로 삭였다. 물론 참모들에게 화를 낸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물태우'란 별명답게 대체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유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성격이 불 같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한번 화가 나면 청와대 참모들을 쥐 잡듯이 잡았다고 한다. 이원종 전 정무수석,
정치권이 이원집정부제를 주장하는 의도는 사악하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외치는 대통령이, 내치는 총리가 각각 나눠 맡는 이원집정부제 구조는 일반적으로 분권형 권력구조 형태의 대표격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을 외치던 친박(친박근혜)계에서 이원집정부제 주장이 제기되자 장기집권의 불순한 의도로 탈바꿈한다. 이원집정부제가 권력을 나누기는 커녕 특정 정치 집단의 권력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원집정부제가 권력의 집중화를 막고 집권당이 아닌 야당에게도 권력을 나눠줄 것이란 기대는 멍청하다. 우리나라 지정학적 상황과 정치적 지형에서 외치와 내치를 나누는 것은 오히려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견제 기능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피보는 것은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일 것이다. 지난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언급해 정치권에 파장이 일었을 때다. 정치권 사정에
민주적 절차에 따른 정권 이양이 자리잡으면서 역대 정부에서는 전쟁같은 '혁명' 대신 '개혁'이 주요 국정 과제로 제시된다. 그러나 때때로 개혁 이상의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혁명적 개혁'이 시대정신으로 등장하곤 한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정부의 경우 '군사혁명'에 필적하는 '문민혁명'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정 비전으로 아예 '신(新)한국 창조'를 내세웠다. 나아가 문민정부 원년을 민족사 복원의 원년으로 선포하는 등 바로 직전까지 이어졌던 군부정부를 청산하고 그 잔재를 일소하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한 정부였다. 군사정권이 초래한 불행한 과거를 극복한다는 목표 아래 개혁 대상과 그 방향이 비교적 뚜렷했고 그에 따라 개혁에 대한 국민 지지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김영삼정부가 군사독재라는 내부적 요인과의 단절을 위한 개혁이 필요했다면 김대중정부는 외환위기라는 국외적 요인과의 단절을 위해 역시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시대적 과제로 설정했다. 21세기를 인간혁명과 농업혁명
19세기로 들어서자 세상은 다시 한 번 노예무역에 관심을 기울였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다시 친구들과 모여 노예무역 금지운동에 매진했다. 그 힘으로 1804년 6월 윌버포스의 노예무역폐지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하지만 상원에서는 회기일정으로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1805년에도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됐다. 윌버포스는 1806년부터 휘그당의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 해 총선에서 노예제 문제가 중요 선거 이슈로 떠오르면서 윌버포스는 다시 하원의원으로 당선됐고 노예제 폐지운동에 대한 책자도 간행했다.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에 대한 헌신적인 활동에 공감을 표했던 당시 그렌빌 수상은 노예무역금지 법안을 상원에서 먼저 가결하는 것이 현명하다면서 이를 상원에 제안하도록 했다. 다행히 상원에서는 의원 다수가 찬성해 법안이 쉽게 통과될 수 있었다. 마침내 1807년 2월 23일 하원에서도 283대 16으로 법안이 통과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날 하원 의원들은 일제히 의석에서 일어
벤자민 버튼, 아니 정치인의 시계는 보통 시계와는 거꾸로 가는 걸까. 국회의 시간과 날짜에 대한 인식은 ‘역산’이다. 시한을 정해놓고 그 디데이부터 지금까지 거꾸로 세는 것이다. 논의를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느냐보다 시한으로부터 몇 일 남았는지가 더 중요한 셈법이다. 이걸 감안하지 않고서는 툭하면 파행하고 결렬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내년 총선 선거제도, 그 중에서도 선거구 획정이 진통에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13일 획정안에 극적으로 사인해도 법안 형태로 만들고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하니 '13일 데드라인'은 지키지 못한다. 헌법재판소의 인구편차 2:1 결정으로 선거구 획정 논란이 본격화한 건 지난해 10월부터다. 그토록 오래 논의하고 여태 결론을 못 내는가 의아할 수 있다. 법적 시한은 이미 넘긴 것 아니냐고? 관건은 '진짜' 시한이 언제냐 하는 점이다. 선거구 획정에는 무려 다섯 개의 시한이 있다. 13일은 그 두번째 시한일뿐이다. 첫째 시한은 지난 10월13
영국에서 일어난 반(反) 노예제 운동이 단순히 사회적 계몽이나 운동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영국이 처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사회개혁 차원의 진보성을 담보하면서도 영국 정치 시스템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구현한 데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주도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영국 의회에 제출되고 마침내 통과된 시기는 미국 독립혁명으로부터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까지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이 혁명의 '위협'에 휩쓸리던 때다. 혁명사상의 전파는 영국 내 사회경제적 모순이 분출되는 계기가 되면서 기존의 국가 시스템과 헌정체제가 전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를 벗어나고자 했던 미국은 영국이 정의와 인간성에 반하는 노예무역을 지속하는 위선적 상황을 들어 노예 같은 상황을 강요하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공격했다. 영국은 자신들의 법체계와 사회 시스템이 모든 시민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비롯해 생
정치를 지망하는 청년들은 어떤 정치가를 본받아 정치를 배워야 할 지 망설이게 된다. 어느 나라에나 권력쟁취에 성공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정치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를 미래의 표상으로 삼아 개혁가의 정신과 의지를 배울 수 있다. 윌버포스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정치인, 박애주의자로 노예무역 금지법안을 통과시켰고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사회개혁가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소개된다. 케빈 벨몬트의 '윌리엄 윌버포스: 인류의 영웅(A Hero for Humanity)'의 서문을 쓴 찰스 콜슨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만일 윌리엄 윌버포스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그 생활에 만족하고 지냈다면 그는 쉽게 영국의 수상, 그 시대 가장 힘 있는 정치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윌버포스는 영국 수상의 자리와 권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종걸 원내대표는 지난 5월 원내대표직에 뽑혔다. 임기 첫날이 5월9일이었으니 원내대표로 활약한 것이 10일로 어느덧 반년이 넘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원내대표직이 이 원내대표에게 '독이 든 성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내대표가 가진 '비주류'의 모습은 제1야당의 원내대표로 활약하는 모습을 통해 일정부분 희석됐다. 실제로 이 원내대표는 독립투사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인권변호사 활약 등 뛰어난 배경과 경력을 가진 야권 정치인이었지만 '비주류' 이미지 때문에 존재감을 보이지 못해왔다. 다만 이 원내대표의 대중 정치인으로써의 인지도는 아직 미약하다. 현재 4선 의원, 내년 재선에 성공하면 5선 의원인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동료 의원들은 이 원내대표가 더 큰 정치를 하려면 보다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비주류의 껍데기를 확실하게 떼고 유력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새정치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이 원내대표를 두고 "비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공무원연금법 처리와 '사퇴파동'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은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습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내년 총선 '물갈이설'까지 불거지는 정치적 시련 속에서 끝내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개인적 시련마저 겪게 됐습니다. 각자 정치적으로 처한 입장이 다르더라도 빈소에서만은 유 전 원내대표에게 위로의 인사가 건네질 법도 한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유 전 원내대표 '사퇴파동' 당시 입장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던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누구보다 먼저 빈소를 찾았습니다. "유 전 원내대표와 내가 무슨 갈등이 있느냐"고 반문하며 유 전 원내대표 위로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유 전 원내대표와 경쟁했던 이주영 새누리당 의원은 이탈리아에서 귀국하자마자 대구로 달려왔습니다. 이주영 의원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 문자로 유 전 원내대표의 부친상 소식이 뜨더라"며 피곤함을 애
진영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사회의 혁명적 변화도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와 합의에 따른 합리적인 개혁에 기반해야 한다고 봤다. 특히 의회는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개혁을 이끄는 개혁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다. 오랜 의회주의 전통에 기반해 사회개혁의 중심에 서온 영국 의회정치는 우리 국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 뿐 아니라 복지국가를 이룩하기까지 의회가 사회 구조의 변화와 국민들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며 사회개혁의 중심에 서왔다는 점에서다. 양당 체제를 이루고 있는 영국의 정당들은 경쟁적으로 사회개혁 주도에 뛰어들어 상대당의 정책까지 수용하는 파격과 유연함을 발휘하며 중도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1820년대 이르러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층의 정치참여 욕구가 높아지자 영국 의회는 산업자본가와 노동계급으로 참정권을 확대했다. 귀족과 지주층 중심의 보수당과 진보적인 산업자본가를 받아들인
'사람은 운명에 의해 만들어지는 피조물'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오늘 내 자신이 ‘정치의 현장’에 서게 될 것이라고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두드려서는 안 될 문으로 생각했다. 전공분야도 정치와는 관련이 없는 회사법과 계약법을 선택했다. 정치 문외한으로 지내다가 어느 순간 정치의 끄트머리에 서게 됐는데 그 모두가 내 스스로 계획해서 선택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 어떤 운명에 의해 이뤄진 것과도 같다는 생각에 젖을 때가 많다.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전개됐고 나와의 타협이 그렇게 만들어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내가 지금은 거친 정치의 들판에 외롭게 서 있다. 더 이상 운명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내 의지로 그것을 받아 들였고 내 의지의 실천으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정치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순간순간 신속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는 ‘최선의 완벽함’을 추구해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