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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로 들어서자 세상은 다시 한 번 노예무역에 관심을 기울였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다시 친구들과 모여 노예무역 금지운동에 매진했다. 그 힘으로 1804년 6월 윌버포스의 노예무역폐지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하지만 상원에서는 회기일정으로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1805년에도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됐다. 윌버포스는 1806년부터 휘그당의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 해 총선에서 노예제 문제가 중요 선거 이슈로 떠오르면서 윌버포스는 다시 하원의원으로 당선됐고 노예제 폐지운동에 대한 책자도 간행했다.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에 대한 헌신적인 활동에 공감을 표했던 당시 그렌빌 수상은 노예무역금지 법안을 상원에서 먼저 가결하는 것이 현명하다면서 이를 상원에 제안하도록 했다. 다행히 상원에서는 의원 다수가 찬성해 법안이 쉽게 통과될 수 있었다. 마침내 1807년 2월 23일 하원에서도 283대 16으로 법안이 통과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날 하원 의원들은 일제히 의석에서 일어
벤자민 버튼, 아니 정치인의 시계는 보통 시계와는 거꾸로 가는 걸까. 국회의 시간과 날짜에 대한 인식은 ‘역산’이다. 시한을 정해놓고 그 디데이부터 지금까지 거꾸로 세는 것이다. 논의를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느냐보다 시한으로부터 몇 일 남았는지가 더 중요한 셈법이다. 이걸 감안하지 않고서는 툭하면 파행하고 결렬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내년 총선 선거제도, 그 중에서도 선거구 획정이 진통에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13일 획정안에 극적으로 사인해도 법안 형태로 만들고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하니 '13일 데드라인'은 지키지 못한다. 헌법재판소의 인구편차 2:1 결정으로 선거구 획정 논란이 본격화한 건 지난해 10월부터다. 그토록 오래 논의하고 여태 결론을 못 내는가 의아할 수 있다. 법적 시한은 이미 넘긴 것 아니냐고? 관건은 '진짜' 시한이 언제냐 하는 점이다. 선거구 획정에는 무려 다섯 개의 시한이 있다. 13일은 그 두번째 시한일뿐이다. 첫째 시한은 지난 10월13
영국에서 일어난 반(反) 노예제 운동이 단순히 사회적 계몽이나 운동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영국이 처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사회개혁 차원의 진보성을 담보하면서도 영국 정치 시스템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구현한 데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주도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영국 의회에 제출되고 마침내 통과된 시기는 미국 독립혁명으로부터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까지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이 혁명의 '위협'에 휩쓸리던 때다. 혁명사상의 전파는 영국 내 사회경제적 모순이 분출되는 계기가 되면서 기존의 국가 시스템과 헌정체제가 전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를 벗어나고자 했던 미국은 영국이 정의와 인간성에 반하는 노예무역을 지속하는 위선적 상황을 들어 노예 같은 상황을 강요하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공격했다. 영국은 자신들의 법체계와 사회 시스템이 모든 시민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비롯해 생
정치를 지망하는 청년들은 어떤 정치가를 본받아 정치를 배워야 할 지 망설이게 된다. 어느 나라에나 권력쟁취에 성공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정치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를 미래의 표상으로 삼아 개혁가의 정신과 의지를 배울 수 있다. 윌버포스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정치인, 박애주의자로 노예무역 금지법안을 통과시켰고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사회개혁가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소개된다. 케빈 벨몬트의 '윌리엄 윌버포스: 인류의 영웅(A Hero for Humanity)'의 서문을 쓴 찰스 콜슨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만일 윌리엄 윌버포스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그 생활에 만족하고 지냈다면 그는 쉽게 영국의 수상, 그 시대 가장 힘 있는 정치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윌버포스는 영국 수상의 자리와 권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종걸 원내대표는 지난 5월 원내대표직에 뽑혔다. 임기 첫날이 5월9일이었으니 원내대표로 활약한 것이 10일로 어느덧 반년이 넘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원내대표직이 이 원내대표에게 '독이 든 성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내대표가 가진 '비주류'의 모습은 제1야당의 원내대표로 활약하는 모습을 통해 일정부분 희석됐다. 실제로 이 원내대표는 독립투사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인권변호사 활약 등 뛰어난 배경과 경력을 가진 야권 정치인이었지만 '비주류' 이미지 때문에 존재감을 보이지 못해왔다. 다만 이 원내대표의 대중 정치인으로써의 인지도는 아직 미약하다. 현재 4선 의원, 내년 재선에 성공하면 5선 의원인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동료 의원들은 이 원내대표가 더 큰 정치를 하려면 보다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비주류의 껍데기를 확실하게 떼고 유력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새정치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이 원내대표를 두고 "비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공무원연금법 처리와 '사퇴파동'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은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습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내년 총선 '물갈이설'까지 불거지는 정치적 시련 속에서 끝내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개인적 시련마저 겪게 됐습니다. 각자 정치적으로 처한 입장이 다르더라도 빈소에서만은 유 전 원내대표에게 위로의 인사가 건네질 법도 한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유 전 원내대표 '사퇴파동' 당시 입장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던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누구보다 먼저 빈소를 찾았습니다. "유 전 원내대표와 내가 무슨 갈등이 있느냐"고 반문하며 유 전 원내대표 위로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유 전 원내대표와 경쟁했던 이주영 새누리당 의원은 이탈리아에서 귀국하자마자 대구로 달려왔습니다. 이주영 의원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 문자로 유 전 원내대표의 부친상 소식이 뜨더라"며 피곤함을 애
진영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사회의 혁명적 변화도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와 합의에 따른 합리적인 개혁에 기반해야 한다고 봤다. 특히 의회는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개혁을 이끄는 개혁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다. 오랜 의회주의 전통에 기반해 사회개혁의 중심에 서온 영국 의회정치는 우리 국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 뿐 아니라 복지국가를 이룩하기까지 의회가 사회 구조의 변화와 국민들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며 사회개혁의 중심에 서왔다는 점에서다. 양당 체제를 이루고 있는 영국의 정당들은 경쟁적으로 사회개혁 주도에 뛰어들어 상대당의 정책까지 수용하는 파격과 유연함을 발휘하며 중도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1820년대 이르러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층의 정치참여 욕구가 높아지자 영국 의회는 산업자본가와 노동계급으로 참정권을 확대했다. 귀족과 지주층 중심의 보수당과 진보적인 산업자본가를 받아들인
'사람은 운명에 의해 만들어지는 피조물'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오늘 내 자신이 ‘정치의 현장’에 서게 될 것이라고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두드려서는 안 될 문으로 생각했다. 전공분야도 정치와는 관련이 없는 회사법과 계약법을 선택했다. 정치 문외한으로 지내다가 어느 순간 정치의 끄트머리에 서게 됐는데 그 모두가 내 스스로 계획해서 선택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 어떤 운명에 의해 이뤄진 것과도 같다는 생각에 젖을 때가 많다.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전개됐고 나와의 타협이 그렇게 만들어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내가 지금은 거친 정치의 들판에 외롭게 서 있다. 더 이상 운명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내 의지로 그것을 받아 들였고 내 의지의 실천으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정치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순간순간 신속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는 ‘최선의 완벽함’을 추구해야 하
다음 두 가지의 사상사적 기반이 리버럴리스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다 풍요롭게 했다. 민족주의(nationalism)와 인간주의(humanism)다. 현대에 우리 민족 앞에 놓인 현실은 고통에 가까웠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로 인해 남북이 분단돼 서로가 이질적인 체제로 대립하게 됐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 전쟁은 사상자만도 100만명이 넘어섰고 20여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여만명의 전쟁고아가 피눈물 나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 놓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빚어진 한반도 분단의 책임도 일본에 있다. 2차 대전 이후만이라도 세계가 올바른 역사의 길을 걸었다면, 미국이나 소련이 그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어야 했다. 오히려 전범국가인 일본이 분단됐어야 했다. 나는 이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은 '뒤바꿔진 역사'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우리 민족 지도자들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했다. 그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서로 상반되는 가치로 부딪힌다. 국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검인정 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이들 교과서가 북한을 사실상 추종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지나치게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서술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적 가치로 추구하는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유주의 사관'에 기반해 북한의 인권과 전체주의 사회 문제를 짚어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북한 뿐 아니라 일제 식민 시대와 분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산업화 과정 등에 대한 역사관도 비슷한 양상으로 충돌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민족주의적 관점으로만 보면 산업화와 경제성장 등 우리 근현대사의 '밝은 면'보다는 식민 지배와 분단 등 '어두운 면'을 부각하는 이른바 '자학사관'을 형성한다는 지적을 제기한다. 국정화의 주요 논거로 사용되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론자들은 민족의 비극을 덮고 친일·독재
"경남 고성군수 당선시켜 보이겠다." 10.28 재보선 전 새정치연합 고위 당직자가 호기롭게 한 말이다. 뚜껑을 열자 빈 말이 되고 말았다. 이번 재보선이 아무리 소규모였더라도 선거는 선거다. 여기서 야당은 또 졌다. 그나마 주목받았고 여권 후보의 표분산으로 야당이 가능성도 있다고 봤던 경남 고성군수 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는 무소속보다 득표율이 낮았다. 야당이 선거에 집중할 여건이 아니긴 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때문이다. 그러나 새정치연합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여론이 찬성보다 높게 나오는 가운데서도 이를 지지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세월호 참사의 여파 속에서도 야당은 승리하지 못했다. "백약이 무효"라는 자조섞인 말도 당 안팎에서 나온다. 다양한 패인이 제기되겠지만 무엇보다 교과서 '올인'의 비용이 크다. 문 대표는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향해 민생을 외면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지만 야당 자신부터 민생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메시지는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은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연방 회의에서 미합중국 헌법 초안이 완성된 후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이 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발표한 85편의 글을 묶은 것이다. 그해 10월 알렉산더 해밀턴이 1호 논문을 뉴욕의 언론에 실었으며 이후 제임스 메디슨과 존 제이가 동참, 그 다음해 8월까지 장장 10개월 간 매주 미국 헌법이 담고있는 정신과 철학을 설명하는 글이 이어졌다. 연방주의자 논집은 미국 헌법의 해석서로 자리매김했지만 애초에 연방헌법에 반대하는 '반(反)연방주의자(anti-federalist)'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물이었다. 연방헌법 비준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뉴욕주에서 '카토'와 '브루투스'란 필명으로 헌법비준에 반대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 것이 발단이 됐다. 로마 공화정 말기 공화정의 수호자로 자처한 이들의 이름을 빌어 연방헌법이 공화주의에 어긋난다고 공격한 것이다. 이에 맞서 해밀턴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