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고수를 찾아서]법무법인 리안 이재경 변호사
- 세계명작 전시 법률 자문…국내 1호 미술법 전문가
- "미술시장 자금규모 폭증…거래방식 섬세한 논의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아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침소에 들어가 그의 목을 내리친 유대인 여성 유디트. 적장의 잘린 머리를 어루만지듯 잡은 채 누운 유디트의 얼굴에, 운명과 살인, 열기와 허탈이 교차할 때. 시간이 멈춰 그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1'(Udith I)이 지난해 국내에 전시됐다.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이 한국 전시를 마지막으로 해외 전시를 계획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많은 국내 관람객이 오스트리아가 아닌 곳에서 클림트를 감상하는 마지막 행운을 누렸다.
세계적 거장의 작품을 국내 전시에서 만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전시회가 명작의 감동을 전하기까지, 그 이면에는 작품 대여, 운반, 보관, 설치, 철거, 소유권 등을 둘러싼 복잡한 법률적 문제가 존재한다.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법무법인 리안의 고문인 이재경(42·사진) 변호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법률고문으로,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전(展)에 자문을 제공했다.
◇세계명작 전시 법률자문
"작품의 보관 책임이 시작되는 곳이 본국 공항인가 우리 공항인가, 비행기에 실려 공중에 떠 있을 때의 파손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도록에 사용한 이미지가 저작권을 침해하는가는 전시 준비 과정에서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입니다. 특히 작품의 소유권 문제는 국가 간 외교전으로 비화할 수 있어 법률적으로 명확히 해둬야 합니다."
실제로 클림트전을 앞두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작품의 본국 송환을 보증해달라는 조건을 내밀었다. 작품이 자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도난 사고가 발생할 경우 국립현대미술관이 책임져야 한다는 이례적인 요구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클림트의 작품들을 나치에게 강탈당한 뼈아픈 기억 탓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우리 외교부를 통해 작품송환 보증 압력을 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오스트리아의 무리한 요구에 우리가 불필요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며 보증을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절했고, 도난 책임의 부담 없이 클림트의 작품 100여 점을 국내 관람객 앞에 전시할 수 있었다.
◇미술 감각 겸비
독자들의 PICK!
이 변호사는 전시회뿐 아니라 경매, 위작, 작품계약 관련 보험과 세금 분야의 법률적 문제를 다루는 '국내 1호 미술법 전문가'다. 이 변호사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6년 미국 유학 때다. 예술의 도시 뉴욕은 미술에 대한 그의 지적 호기심과 잠재적 욕구를 분출시켰다.
"유학길에 오르기 전 대형로펌에서 기업자문 업무를 하던 저에게 뉴욕은 미술에 대한 눈을 뜨게 했습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예술법(Art Law)을 비롯해 미술 연구에 빠져들었죠. 예술법은 법조인으로서의 자질은 물론, 미술과 문화, 인류학에 대한 이해도 갖춰야 하는 분야라 매력적입니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양혜규씨의 작품 '증서'(Certificate)에는 이 변호사의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묻어난다. 지난 8월 아트선재센터에 전시됐던 이 작품은 한 장의 '약정증서'다. 작품은 "증서를 구매하는 자에게 양혜규의 은행계좌 비밀번호를 공개한다"고 약정한다.

작가는 재산을 보관하는 공간의 열쇠인 '비밀번호'에 재산적 가치를 부여해 증서로 표현하고자 했다. 양 작가는 이 변호사에게 작품이 법률적 형식을 갖추도록 해달라고 자문을 구했다. 이 변호사는 작품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원본 작품의 표현이 다치지 않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법적 형식만을 갖추도록 자문했다.
"단순한 법률지식이 아니라, 현대미술 또는 작가 마인드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던 거죠. 마치 작품에 참여하는 느낌으로 자문했습니다." 실제로 '증서'에는 이 변호사가 등장한다. 작품에는 "공증에 대한 구체적 업무는 법무법인 리안의 이재경 변호사가 수행한다"는 내용과 함께 이 변호사의 도장이 찍혀있다.
◇국내 처음 '예술법' 강의
이 변호사는 고려대와 건국대에서 국내 최초로 예술법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예술법에 정통한 법률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변호사는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이나 메트로폴리탄, 현대미술관 등은 자체적으로 법률팀을 보유하고 있다"며 "우리 미술관과 박물관도 소장작품 보호와 전시기획을 돕는 법률 전문가를 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문화재 보호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도난 혹은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본국으로 반환하도록 한 사법통일국제연구소(UNIDROIT)의 '문화재환수협약' 가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변호사는 "협약이 국내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문화재 반환청구의 요건과 절차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 차원에서 문화재를 보호하려면 궁극적으로는 협약에 가입해 세관에서부터 도난 및 불법반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 거래 투명해져야 작가권리 보호"
미술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세제에는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최근 미술품 시장에 유입되는 자금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는데도 미술 거래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미술품이 대기업의 비자금 통로나 뇌물로 활용되는 사례도 적발된다.
미술단체들은 미술시장의 위축을 이유로 세금 부과에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변호사는 "시장 활성화를 위해 세금 부과를 늦출 필요가 있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양도소득세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술 산업계가 투명해져야 작가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권리도 찾아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틀을 깨는 표현은 미술의 매력"
이 변호사는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는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미술에서 틀을 깨는 혁신을 봅니다. 미술의 역사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표현 방식을 무한히 수용해온 과정이었습니다."
현대미술의 표현 양식이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그에 대한 저작권 보호와 거래방식이 보다 섬세하게 논의돼야 한다는 인식도 제고되고 있다. 미술사에 정통한 법률 전문가인 이 변호사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연구실에는 마티스의 작품 '춤'(The Dance)이 걸려 있다. 그림 속 역동적인 모습이 국내 예술법 분야 개척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는 이 변호사의 모습과 겹쳤다.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학술활동을 벌일 계획"이라며 "국내에서 체계적인 미술법 교과서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