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25시] 미술품은 '그들만의 화폐'
오리온그룹이 갤러리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도 그림을 상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그림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왜 일까.
◇서미갤러리, 비자금·뇌물통로로 '입방아'
오리온그룹은 2006년 7월 회사 소유의 서울 강남구 청담동 창고부지를 시행사 E사에 싸게 매각하는 것처럼 다운계약서를 작성하면서 40억여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을 받고 있다. E사는 당시 40억여원을 서미갤러리로 입금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비자금이 서미갤러리를 거쳐 오리온그룹으로 다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서미갤러리는 비자금 세탁처로 지목됐다.
서미갤러리는 한 전청장의 뇌물혐의 수사에도 등장한다. 한 전청장은 국세청 차장을 지내던 2007년 1월 전군표 당시 국세청장에게 인사청탁과 함께 고 최욱경 화백의 그림 '학동마을'을 상납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 전청장 측은 "부하직원에게 지시해 서미갤러리에서 500만원에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서미갤러리는 삼성 수사 당시 등장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사진)을 언론에 공개한 바 있다. 당시 납입자본금 3억원으로 신용등급이 C등급인 서미갤러리는 크리스티경매에서 87억원에 달하는 '행복한 눈물' 외에도 프랭크 스텔라의 '베들레헴병원'과 바넷 뉴먼의 '화이트파이어', 데이비드 호크니의 '닉 와일더의 초상', 에드 루샤의 '디자이어' 등 수백억 원에 달하는 작품들을 함께 낙찰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출처·가격 당사자만 아는 '비밀거래'
서미갤러리는 큰 손 고객의 미술품 거래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탈세와 로비의 통로로 자주 활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금으로 그림을 거래하고 회계장부도 없어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 전청장의 그림로비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 역시 그림의 출처와 가격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그림은 양도소득세와 취득·등록세 등 각종 세금이 붙지 않아 불법 증여·상속에 단골 메뉴로 이용된다. 대부분 대그룹 집안 부인과 자녀가 갤러리를 운영하는 것 역시 합법적인 탈세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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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 문화사업 및 작가 발굴 등의 명목으로 갤러리를 세워 실제로는 기업의 자금세탁에 활용한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그림은 '그들만의 화폐'로 쓰인다는 말도 나온다.
◇"미술시장 위축" vs. "투명성 갖춰야 작가권리 찾아"
국회는 6000만원 이상 미술품 거래에서 매매차익에 대해 20%를 과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지난해 법 시행을 2년간 유예했다. 시장 위축을 우려한 미술단체의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안이 시행되면 그림을 사는 컬렉터가 줄어들어 미술시장이 더욱 침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미술품 거래가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재벌의 미술품 거래관행의 문제만으로 전체 미술시장을 위축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미술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세제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의견이 다수다. 최근 미술품시장에 유입되는 자금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는데도 미술 거래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서울 서초동의 A변호사는 "시장 활성화도 중요하지만 그림 거래에 양도소득세를 부과해 시장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미술산업계가 깨끗해져야 작가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권리도 찾아줄 수 있다"고 말한다.
B변호사 역시 "지난 수년간 뇌물, 혹은 비자금 통로로 지목돼 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받은 그림들 가운데 출처가 명확히 드러난 작품은 거의 없었다"며 "더이상 미술작품이 검은 거래의 온상이 되지 않도록 세제와 거래관행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