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이던 중앙정보부가 1961년 창설됐을 때 내세운 원훈이다. 일반 국민들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곳(음지)에서 활동해 국가의 자유와 안보 등(양지)을 추구한다는 의미였다.
37년간 유지됐던 원훈은 정보의 가치를 강조한 국민의 정부 당시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가 2008년에 이르러 현 원훈 '자유의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으로 자리 잡았다. 현 원훈은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름 없는' 요원들이 양지를 추구한다는 핵심에서 1961년 것과 같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일까. 잘 드러나지 않던 국정원에 대한 국민의 상상은 여러 문화 분야의 소재로 애용됐다. 1998년작 영화 '쉬리'는 북한 정보요원의 음모를 막는 국정원 요원이 출연했고, 2000년 이후에도 2009년 드라마 '아이리스', 2010년 웹툰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2년 영화 '베를린'에도 출현하며 '멋진' 역할을 주로 도맡았다.
하지만 멋진 상상은 언젠가 깨지는걸까. 국정원은 2012년 대선 개입 의혹을 받게 되며 몸체를 현실 세계(다른 의미에서 양지)로 자주 드러내더니 최근에는 '서울시 간첩 사건'과 관련해 연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국정원을 빼놓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있을까'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지경.
출현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영화 속 정장을 입고 액션을 펼치거나 컴퓨터로 정보를 파내는 만능 요원들은 오간 데 없다. 목도리로 얼굴을 꽁꽁 싸맨 채 말을 아끼거나 보도자료 등을 통해 연일 의혹에 대해 해명하기 바쁘다.
최근 논란이 이는 '증거위조 사건'은 만능과는 거리가 먼 무능의 정점에 있다. 1심에서 간첩 혐의로 기소돼 무죄를 선고 받았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피고인 유우성씨(34)와 관련, 핵심 증거가 위조된 정황이 속속 드러나기 때문이다. 증거 위조 논란의 핵심 연루자인 국정원 협력자는 국정원을 '국조원(국가조작원)'이라고 표현하고 자살을 기도했다.
박근혜 정부 취임 후 짧지 않았던 지난 1년여간 한국 사회는 양지로 나온 국정원 때문에 골치를 썩여 왔다. '셀프 개혁'이라는 방법으로 정부는 개혁을 약속했지만 상황은 상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만 왔다. 야당과 시민사회에서 '특검' 도입을 연일 주장하는 이유기도 하다. 양지에 나온 국정원, 음지로 보내기 전 대대적 수술이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