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연체료 악용.. '선의의 피해자'만 눈물짓는 꼴
#. 김주혁씨(25·A대 전기전자공학부4)는 지난 1학기 말로만 듣던 '도서실종사건'을 겪었다. 당시 '현대사회와 광고'라는 교양수업을 듣던 김씨는 '설득커뮤니케이션의 이해와 활용'이라는 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책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다른 학과 전공교재로 쓰이던 터라 해당 학과 학생들이 연체도 불사하고 한 학기 내내 빌렸던 것.
책을 대출해 간 뒤 반납하지 않는 '얌체족' 때문에 대학도서관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각종 수험서부터 일반도서까지 '얌체족'이 노리는 도서는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 그들의 주된 '먹잇감'은 값비싼 전공도서. 대학도서관 연체료가 하루 100원에 불과하다 보니 도서를 체납하고 연체료를 내는 게 전공도서 구입비용보다 더 싸다는 판단에서다.
◇하루 연체료 100원.. "빌려서 버티는 게 수지맞는 장사"
지난 29일 A대학 도서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부동산학과의 전공도서인 '토지정책론'은 총 5권 중 4권이 대출중이고 1권은 대출불가 상태다. 경제학부의 전공도서 '국제금융론', 비교민속학과의 전공도서 '민간신앙론', 응용통계학과의 전공도서 '보험통계학' 등도 상황은 같다. '얌체족'들이 도서를 대출해가선 기일이 지나도 반납하지 않아서다.
김씨는 "책을 빌려가 제때 반납하지 않는 학생이 부지기수"라며 "이런 '얌체족' 때문에 나 같은 학생만 '선의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은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다. B대학 기계공학과에 재학중인 박장희씨(23·남)는 참고서적을 빌리려다 실패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박씨는 이에 대해 도서관 연체료가 너무 싸서 벌어진 일이라고 지적한다. 책값보다 싼 연체료가 학생들의 이기심을 조장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등 서울 주요대학 20곳을 조사한 결과, 5개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교에서 도서관 연체료로 하루 100원을 부과하고 있었다.(표 참조).

대학의 한 학기는 보통 16주다. 그중 연체료 없이 도서를 대출할 수 있는 기간 4주(기본2주+연장2주)를 제외한 12주(약 84일) 간 도서를 체납해도 연체료는 8400원에 불과하다. 앞서 김씨가 빌리려던 책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와 활용'은 시중가로 2만3000원. 김씨가 '얌체족'이 됐다면 한 학기에 약 1만5000원은 아낄 수 있었던 셈이다.
상황을 아는 학생들 사이에선 책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C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 한빛씨(24&·여)는 "학기 첫 수업이 끝나면 너나 할 것 없이 도서관으로 우루루 몰려간다. 수업교재를 경쟁적으로 대출하기 위해서다"며 "당연히 (책을) 사는 것 보다 한 번 빌려서 버티는 게 수지맞는 장사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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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체료 인상이나 도서관 출입 제한도 고려 중"
'얌체족'이 급증하면서 학생들의 불만 역시 커지고 있다. 실제 A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지난 8월1일 '도서관 책 반납 연체가 몇 달씩 돼도 독촉 안 하나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연체가 2월27일부터 8월1일까지 6개월이 다 돼가고 있다. 독촉해도 반납 안 하면 끝이냐"고 하소연했다. 게시 후 해당 글에는 '연체료를 올려야 한다', '연체일 만큼 대출기간에 제한을 둬야 한다' 등의 댓글이 잇따랐다.

이에 학교 측도 대책마련에 나섰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A대학 도서관 관계자는 "(도서연체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커져 30일 이상 연체자에게 가하던 제재를 올해 3월부터 10일로 줄였지만 도서연체가 기대했던 것만큼 줄진 않았다"며 "향후에도 불만이 계속 접수된다면 연체료를 올리거나, 심하게는 도서관 출입 자체를 제한하는 방침까지 고려중"이라고 전했다.
학생들은 이같은 현실이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취업준비생 홍재명씨(26·D대 경영학과4)는 "갈수록 극심해지는 취업난 속에 어학 및 자격증수험서부터 기업별 인·적성 대비서적까지 필요한 책이 한 두 권이 아니다"라며 "전공서와 취업준비서적을 모두 사기에는 대학생 용돈으로 빠듯한 게 사실이다. 전공서적을 체납해서 아낀 돈으로 취업서적을 사는 게 현명하다고 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