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유명철 경희대 의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입학원서 ‘의대’로 고친 어머니..15년뒤 '세계 최초' 수식어 붙는 정형외과 명의로
아버지 의수가 정형전문의로 유도..30대때 두동강난 허벅지 세계최초 봉합
40년간 하루 1회꼴 인공관절술...무료진료봉사만 7만5000명
(서울=뉴스1) 이영성 기자,음상준 기자 =

“너도 법학을 공부해서 좋은 일 많이 해라.”
1960년 검사 출신 부친 고 유승준씨가 아들 유명철 교수(73)에게 대학입시가 다가오면서 했던 조언이다. 하지만 봉사에 뜻이 있던 어머니는 대학 지원 마감날, 입학원서 지원대학란에 ‘법대’를 지우고 ‘의과대학’으로 고쳐썼다.
그로부터 그의 인생은 세계 최초 수식어가 따라붙는 의학도가 됐다. 1976년 세계 최초로 허벅지 절단환자의 재접합수술에 성공했고 그 이후 재접합술 500례를 달성했다. 인공관절술은 1만5000례 이상을 집도했다. 유 교수는 최근 세계 3대 인명사전인 '마르퀴즈 후즈후 인더월드' 2016년판에 등재됐다. 그는 현재 정형외과 세계 권위자로 불린다.
지원 학과가 갑자기 뒤바뀌게 된 사연은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가 의학이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내린 결정 때문이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유명철 경희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전 경희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경희의료원장)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됐다.
유명철 교수는 최근 <뉴스1>과 만나 “법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법학을 전공할 계획이었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결국 196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대학 선택은 어려웠지만 의대 안에서의 세부전공 선택은 쉬웠다. 아버지가 항상 착용해왔던 의수 영향이 컸다. 그는 의대 입학 처음부터 정형외과의를 목표로 공부했다.
유명철 교수는 “부친이 과거 철도사고가 나서 왼손이 절단돼 의수를 착용했다”며 “정형외과를 공부해 절단된 팔과 다리를 붙이는 수술을 꼭 성공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고 전공 선택 배경을 설명했다.
◇세계 최초 허벅지 재접합술 성공...경희대 설립자 “유명철 서울대 복귀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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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지만 경희대에서 40년 넘은 인생을 보내온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경희대학교 설립자인 고 조영식 박사(서울대 법대)가 1971년 경희의료원을 설립하면서 의료인 수가 부족하다 보니 서울대 동문들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 때 전공의(레지던트) 과정을 마쳤던 유 교수도 경희의료원으로 건너갔다. 당초 3년 정도 일한 뒤 병원이 안정되면 다시 서울대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경희의료원에서 근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 최초로 허벅지 재접합술을 성공시켰던 일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1976년이었던 당시에는 그런 수술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례도 없었다. 그러나 유 교수는 목재소 작업현장에서 허벅지가 전기톱에 절단된 환자의 다리를 찾아 접합술을 시행했다. 결국 세계 최초의 성공사례를 만들었다. 8시간의 수술 끝에 환자는 다리가 봉합됐고 이후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었다.
세계 첫 사례여서 병원이 들썩였던 것도 있지만 그가 의학도의 길을 걷게 된지 불과 15년이 된 30대 나이에 이뤄냈다는 것도 그의 인생 기록이다. 유 교수가 전문의 4~5년 차였을 때였고 당시 절단 부위를 혈관확대 현미경을 이용해 수술을 진행했다. 요즘 말하는 미세수술 분야이다.
결국 조 총장은 유 교수의 서울대병원 복귀를 막았다. 경희의료원에서 반평생을 보내게 된 건 이러한 조 총장의 압력(?)이 시발점이 된 셈이다. 이후 유 교수는 지속적으로 재접합술을 성공시켜나갔다. 엄지손가락이 없는 환자에게 엄지발가락을 떼어 접합시킨 것도 첫 허벅지 재접합술 이후 2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그 뒤 손가락, 팔, 다리, 발목 등 총 500례 이상 접합술을 달성했다.

◇인공관절술 1만5000례 달성...관절 분야 대가로
그는 정형외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관절염 분야에서도 큰 두각을 보였다. 골절은 붙이면 되지만 관절염은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쓸 수 없어 유 교수의 숙제는 바로 이 관절염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새 것으로 교체하기 위한 인공관절술을 선택했다. 염증 부위를 인공관절로 바꾸는 것이다.
초기엔 인공관절 기술이 지금처럼 뛰어나지 않아 부작용도 뒤따랐다. 하지만 점차 ‘세라믹’ 인공관절도 시중에 나오면서 그러한 문제는 줄었다.
현재 잘 알려진 고관절(골반과 대퇴골을 잇는 관절)술은 관절 전체를 인공관절로 바꿔주는 ‘전치환술’과 절반 정도만 바꾸는 ‘반치환술’, 겉 부분만 교체하는 ‘표면치환술’이 있다. 유 교수는 표면치환술을 1990년대 중반 처음으로 국내 도입했다. 보통 고관절의 손상정도와 연령 등에 따라 치환술 방법이 결정된다.
유 교수는 이를 포함해 현재까지 인공관절술 1만5000례를 달성했다. 개인이 기록한 것으로는 최대 규모다. 그는 약 40년간 1년에 375회, 하루에 한 번 꼴로 인공관절술을 해왔다.
◇은사의 가르침..대학때 만든 ‘세븐클럽’이 인생의 자극제
그는 의사로서 좋은 의술을 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해야 한다는 것을 늘 상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처음 의대를 진학하면서 결심했던 봉사활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유 교수는 어머니의 영향도 컸지만 서울대병원 은사였던 故 한문식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의사가 돼야 한다는 게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유 교수는 “옛날만 해도 병원 의사가 목에 힘주기도 했지만 약자를 돌보는 사람이 바로 의사다. 의대에서 공부 시작할 때부터 좋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제자들에게도 의사이기 전에 인격과 도덕적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늘 가르치고 잔소리해왔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그의 경희대 제자만 200명이 넘는다.
의대를 다닐 때부터 시작했던 무료진료 봉사활동은 형태는 다르지만 지금까지도 진행하고 있다. 의대는 주로 방학 때 의사가 없는 시골을 뜻하는 ‘무의촌’에서 무료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
의대 본과 2학년 때 무의촌에 가서 무료진료를 했던 과 동기들 7명은 ‘세븐클럽’을 만들었다. 단순 동아리가 아닌, 기왕 의사가 됐으니 좋은 일에 기여해보자는 목표로 만든 조그만 봉사 단체였다. 이 구성원에는 現 성균관대 서정돈 이사장과 미국에서 성공가도를 달린 성형외과 전문의 백세민 박사 등도 있다.
유 교수는 “세븐클럽 구성원들은 모두 의대 안에 다른 전공을 가졌다. 나는 정형외과이고 다른 친구는 소아과, 또 다른 친구는 영상의학과도 있었다”며 “지금도 기억에 남고 앞으로의 생활을 하는데 있어 여전히 자극이 되고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본격적인 무료진료 봉사는 전문의가 된 이후이다. 제대로 된 봉사활동을 위해 이동검진차량을 만들어 움직이는 병원을 꾸리기로 했다. 주변에 많은 호응으로 모금이 이뤄졌고 1억원짜리 벤츠 버스를 특수 개조하고 엑스레이 등 진료 의료기기를 완비하다보니 당시 총 2억원이 들었다.
유 교수는 “비싼 차여서 조심해야겠다고 했던 농담이 지금까지 기억난다. 이동식 병원을 만들고 주말마다 무료진료를 해왔다”며 “강원도 고성은 물론 안 가본 곳이 없다. 지금까지 무료진료 환자가 7만50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11월 초 보성군과 무료진료를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그는 70대 연세에도 불구하고 의료인으로서 여전히 뜨겁다. 현재 한국인체조직기증원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술시 피부나 뼈, 연골, 혈관을 주로 외국에서 수입하는데, 비용 부담이 크고 에이즈 등 안전문제도 있다보니 우리나라에서 직접 기증받아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단체이다.
유 교수는 “의료인으로서 작은 기여를 해야겠다는 의중에 계속해서 단체를 성장시켜나가고 있다”며 “앞으로도 봉사활동을 지속하면서 의미있게 살아왔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지내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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