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 '위계'(僞計), 지위상 상하 관계 아닌 '속인다'는 의미…'위계' 아닌 '위력'이라고 써야

검찰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해 '피감독자 간음' 혐의로 지난 23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이르면 26일 안 전 지사의 구속 여부를 결정한다. 비서였던 김지은씨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직원 A씨는 안 전 지사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바 있다.
그런데 검찰 구속영장 청구서에 적힌 ‘죄명’과 고소인들의 고소장에 쓰인 ‘죄명’이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이를 두고 안 전 지사에 대한 혐의가 달라진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검찰 예규, 범죄유형 세분화해 정한 죄명 '피감독자 간음'
구속영장에 쓰인 ‘피감독자 간음’은 형법 제303조 '업무상위력 등에 의한 간음'에 속한 범죄다. 즉 김지은씨 변호인단이 낸 고소장에 쓰인 죄명과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범죄다.
'피감독자 간음'은 검찰에서 쓰는 표현이다. 대검찰청 ‘공소장 및 불기소장에 기재할 죄명에 관한 예규’에 따른 것이다. 이 예규는 검찰이 실무적으로 죄명을 구분해 영장이나 공소장 등에 기재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는 경찰도 그대로 준용해 쓰고 있다.
형법에는 각칙(各則)이라 부르는 제87조부터 제372조까지 모두 266개 조문으로 구성된 각 범죄유형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런데 266개 조문이라고 해서 그 안에 포함된 범죄유형이 266개인 것은 아니다. 각 조문의 대표적인 유형 외에 하위 항에 병렬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세부 범죄가 별도로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87조 내란'은 1호 내란수괴죄, 2호 내란모의참여죄·내란중요임무종사죄·내란실행죄, 3호 내란부화수행죄로 구분될 수 있다. '내란수괴죄·내란실행죄' 등으로 구분된 죄명은 형법에 적혀 있는 표현이 아니다. 검찰이 예규로 정한 이름이다. ‘문장’으로 써 있는 각 죄를 ‘단어’로 축약해 서류에 기재해야 할 실무적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형법 제303조의 '업무상위력 등에 의한 간음'은 제1항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항 '법률에 의하여 구금된 사람을 감호하는 자가 그 사람을 간음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로 돼 있다.
이를 검찰 예규에선 3가지 죄명으로 구분하고 있다. 범죄 행위자를 기준으로 피보호자 간음, 피감독자 간음, 피감호자 간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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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僞計)는 속임수란 의미…안희정 혐의는 '위계 아닌 위력'
안 전 지사의 혐의와 관련해 한가지 오해가 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언론사의 착각에 따른 잘못된 정보다.
형법 302·303조 등에 쓰인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에서 '위계(僞計)'는 '거짓 계략'이란 뜻이다. 상대방에게 오인·착각·부지를 일으켜 상대방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한다는 뜻으로, 쉽게 말해 속인다는 의미다.
지위·상하관계를 의미하는 '위계(位階)'와는 다른 말이다. 전혀 다른 뜻의 동음이의어다. 예컨대 A가 성관계를 위해 B에게 장난을 치는 것이지 성관계가 아닌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 B가 속아서 응해야만 '위계간음'이 된다.
여기서 '위계(僞計)'는 성관계 자체에 대한 속임수를 의미한다. 돈을 준다거나 일자리를 구해준다거나 결혼을 하겠다는 등 성행위 자체와 관련된 게 아닌 별도의 '거짓말'은 위계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성관계의 의미를 모르고 속아서 성관계를 갖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법원은 정상적인 성인 피해자에 대해선 위계간음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체로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자에 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전 지사가 '위계에 의한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다는 오해가 생긴 건 이 사건을 최초 보도한 JTBC가 해당 사건을 보도할 때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자막에 이 같은 표현이 노출됐고 손석희 앵커도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일부 다른 언론도 안 전 지사의 혐의를 '위계에 의한 간음'으로 한동안 잘못 썼다.
이후 대부분의 언론에선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제대로 고쳐 썼지만, '업무상 위계에 의한 간음'에서 '위계'를 지위·상하관계에 관한 '위계(位階)'로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한자로 된 어려운 법률용어를 언론사가 오해하고 잘못 쓰면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한글로 쉽게 풀어썼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법률용어를 쉬운 한글로 풀어써야 할 또 다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