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비치에서 WBC까지… 한국 야구, 다시 출발선에 서다

베로비치에서 WBC까지… 한국 야구, 다시 출발선에 서다

정희돈 스타뉴스 전문기자
2026.03.18 09:46
1998년 박찬호의 성실함과 프로의식은 한국 야구가 세계 무대로 나아가던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이후 김병현, 서재응, 봉중근 등이 미국에 진출하고 이승엽, 임창용 등이 일본으로 진출하며 해외 진출이 확장됐다. 이러한 흐름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WBC 4강, 2009년 준우승 등 국제대회 성적으로 이어지며 한국 야구의 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2013년, 2017년, 2023년 WBC에서 세 차례 연속 1라운드 탈락을 기록하며 국제 경쟁력 약화와 구조적 문제가 누적되었고, 이번 WBC 8강 진출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카공화국에 콜드 게임으로 패하며 완전한 회복으로 보기는 어려운 결과를 남겼다.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경기를 앞두고 결의를 다지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AFPBBNews=뉴스1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경기를 앞두고 결의를 다지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AFPBBNews=뉴스1
1994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첫 진출해 LA 다저스에서 활약할 때의 박찬호 사진.
1994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첫 진출해 LA 다저스에서 활약할 때의 박찬호 사진.

지난 1998년 2월 말,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당시 방송 기자였던 나는 LA 다저스 스프링캠프에서 다른 언론사를 피해 박찬호를 독점 인터뷰하기 위해 훈련 시작 두 시간 전인 오전 8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2시간가량 기다렸음에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확인해보니 그는 이미 아침 7시 무렵 훈련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일찌감치 개인 훈련을 마친 뒤 다시 팀 훈련까지 소화하는 것이 하루의 루틴이었다. 다음날 나는 이른 아침, 혼자 달리기하는 그의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다. 다른 선수들보다 세 시간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한국 선수들의 성실함과 프로의식… 이는 당시 우리 선수들이 세계 무대를 향해 나아가던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 흐름은 곧바로 결과로 이어졌다. 박찬호 이후 김병현이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랐고, 서재응과 봉중근 등 여러 투수들이 잇따라 미국에 진출했다. 이승엽과 임창용 등은 일본으로 무대를 넓히며 한국 야구의 해외 진출은 전방위로 확장됐다. 이러한 흐름은 국제대회 성적으로도 나타났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2009년 준우승까지 한국 야구는 뚜렷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이후 흐름은 달라졌다. 2013년, 2017년, 2023년 WBC에서 세 차례 연속 1라운드 탈락을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부진이 아니라 국제 경쟁력 약화와 세대교체 지연, 전력 불균형 등 구조적 문제가 누적된 결과로 해석된다.

이번 WBC에서 한국은 17년 만에 조별리그를 통과하며 8강에 진출해 반등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8강에서 도미니카공화국에 엄청난 전력차를 드러내며 콜드 게임으로 패해, 이를 완전한 회복으로 보기는 어려운 결과를 남겼다. 곽빈 등 일부 젊은 투수들이 국제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구위를 보여주며 세대교체 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타선의 경쟁력과 선수층의 깊이, 경기 운영 측면에서는 여전히 세계 정상과의 격차가 드러났다. 결과는 개선됐지만 내용까지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대회에서 드러났듯 세계 야구 판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메이저리그(MLB) 생태계가 확장되면서 그 안에서 중남미 국가들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2013년 전승 우승을 차지했던 도미니카공화국을 비롯해 베네수엘라,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 중남미 국가들은 더 이상 재능에 의존하는 팀이 아니다. 메이저리그와 직결된 유소년 시스템과 체계적인 육성 구조, 지속적인 투자 속에서 완성된 경쟁력을 갖춘 팀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이번 대회에서 4강에 오른 이탈리아와 같은 비전통 강국까지 가세하며 야구는 특정 국가 중심 스포츠에서 글로벌 경쟁 스포츠로 완전히 전환된 모습이다.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지난 9일 도쿄돔에서 열린 호주와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7-2로 승리하며 8강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강영조 선임기자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지난 9일 도쿄돔에서 열린 호주와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7-2로 승리하며 8강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강영조 선임기자

이러한 변화는 아시아 야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023년 대회 챔피언 일본은 여전히 강력한 리그와 선수층을 갖춘 팀이지만, 이번 대회 흐름은 더 이상 절대적인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야구천재' 오타니 쇼헤이를 중심으로 한 최정상급 전력을 보유하고도 베네수엘라와의 8강전에서 5대8로 지며 탈락한 결과는 상징적이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야구 전체가 새로운 경쟁 환경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결국 이번 WBC는 한국 야구에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지금 우리는 다시 올라가는 과정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하락 흐름 속에서 잠시 반등한 것인가. 8강 진출은 분명 긍정적인 신호지만, 전력 구조와 세계 야구의 변화 속도를 고려하면 아직은 완전한 회복이라기보다 과도기적 단계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회가 남긴 수확도 분명하다. 젊은 투수진에서 확인된 경쟁력은 향후 한국 야구 재건의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구속과 구위, 경기 운영 능력 등에서 이전보다 개선된 모습은 세대교체가 단순한 가능성을 넘어 실제 전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세계 야구는 이미 글로벌 경쟁 체제로 전환됐고, 중남미는 구조적으로 완성 단계에 들어섰으며, 일본조차 절대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 야구가 다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기 성과가 아닌 장기 구조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유소년부터 프로까지 이어지는 일관된 육성 시스템, 국제 경쟁 경험 확대, 데이터와 피지컬 기반의 훈련, 그리고 투수뿐 아니라 타격과 수비까지 포함한 전력의 균형이 요구된다.

이번 WBC는 성과라기보다 현실을 확인한 무대였다. 과거 4강과 준우승으로 이어지던 시절과 현재 8강이라는 결과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우느냐가 한국 야구의 다음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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