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위기 불감증'
위기에는 전조가 있다. 1997년 겨울에 터진 IMF 사태때도 전조가 있었다. 그해 1월 권부에 돈을 뿌리고 은행장을 압박해 빚을 몰아 쓰던 한보가 무너졌다. 여름에는 기아사태가 일어났다. 내가 보기에는 성수대교가 붕괴되고,삼풍백화점이 폭싹 주저앉은 것도 나라가 무너질 전조였던 것같다.
그런데 정부는 전혀 위기감이 없었다.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틈만 나면 "펀더멘털이 튼튼해서 아무 문제 없다"고 자신했다.`위기둔감증'도 아닌 `위기불감증'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원화가치를 부풀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고,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하더니 자만심에 눈이 흐렸던 모양이다.
위기의 전조를 무시한 댓가는 참혹했다. 1930년 미국 대공황이 그랬을까. 거리에 넘쳐나던 실업자와 노숙자들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우리는 이 위기를 잘 넘겼다. 뼈아픈 고통을 참아내면서 대대적인 경제수술을 감행한 덕이다.
그런데 이때 얼마나 놀랐는지 위기에 너무 민감한 `위기과민증'이 생겨났다. 2001년 `9-11사태'가 터졌을 때 정부는 정말 겁이 났다. 대우그룹을 해체하는라 체력을 소진한 상태에서 세계경제가 `테러공포'에 휩싸였으니 겁이 날만도 하다.
정부가 허겁지겁 내놓은 대책에는 "돈을 무제한 찍어서라도 증시와 경제를 떠받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부는 2차 추경예산을 조성해 뿌렸고,한국은행은 콜금리를 단박에 0.5%포인트나 낮췄다. 그뿐인가. 수출이 안되니 내수라도 살려야겠다는 조바심에 소비를 마구 부추겼다. 건설경기를 띄우기 위해 건설규제도 앞뒤 가리지 않고 걷어냈다.
이런 과민반응이 불러온 부작용은 매우 컸다. 국내 경기는 `9-11 사태' 직후 쏟아낸 고강도 부양책이 아니더라도 바닥을 치고 오르는 중이었다. 경제성장률은 2001년 2분기 2.9%에서 3분기 1.9%로 추락했다가 4분기 3.7%로 급반등했다. 단기사이클로 보면 3분기가 바닥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과도한 경기부양책은 회생경제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신용위기의 `뇌관'이 되고,부동산 값이 폭등한 이면에는 `위기과민증'과 이에 따른 과잉대책이 자리하고 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경제상황은 분명 위기다. 심리지표에 이어 실물지표들이 모두 `빨간 불'이다. 생산둔화,투자격감,물가급등,소비위축,수출불안,경상수지 적자 등 좋은 게 하나도 없다. 주가폭락, 환율급등, 금리상승 등 시장지표도 최악이다. 북핵문제가 초래한 `한반도 리스크'는 한국경제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잡고 있다. 앞으로 무엇으로 먹고 살지 `성장동력'마저 막막하다.
더 답답한 것은 정부의 위기대응능력이다. 위기를 알리는 전조가 분명한데도 불감증이 도져 행동이 굼뜨기만 하다. 불감증에 놀라 과민증에 걸리고, 과민증에 놀라 다시 불감증에 걸리는 식이다. 얼마전 HSBC증권은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4.1%에서 3.4%로 낮추면서 그 이유중 하나로 `경제악화를 과소평가하는 정책적 오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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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불감증은 위기보다 위험하다. 위기를 모르면 앉아서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이용하는 지혜 없이는 개혁도 성장도 모두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