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금융인의 도덕적 해이
"구조조정에 당하고, 영업실적이 부진하다고 왕창 깨지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치이느니 한 번 해먹고 뜨는 게 좋을 것 같다."
모 은행 A과장이 몇달 전 친분있는 명동의 사채 업자에게 '매출 60억원 규모의 제조업체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던진 말이다.
A 과장은 제조업체를 공동 인수한 후 6개월에서 1년 가량 작업을 해 어음이나 당좌발행액을 매출의 수 배로 늘린다는 구상이었다.
이어 날을 정해 수백억원어치 어음을 발행한 후 만기 도래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한탕 해 먹자고 제안했다. 그는 도피국가 및 이후 계획 까지 거론했다. 사채업자는 "아직 A씨 근황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걸로 봐 마음을 고쳐 잡은 것 같다"고 전했다.
금융기관 직원들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올 들어 수백억 원대의 횡령 및 금융사고가 수차례 발생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국민.조흥은행 직원이 고객의 양도성예금증서 850억원어치를 빼돌려 해외로 도주한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대신증권 대전지점에 보관됐던 1000여명의 고객정보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은 금융기관의 내부 통제시스템 취약, 선제적인 감시 체계의 부재 등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고객자금을 관리하는 금융기관 직원들의 윤리의식 결여다.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이들이 '한탕'의 유혹에 빠져 본분을 내팽개치는 풍토가 확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적잖다. 윤증현 금감위원장은 최근 강연에서 "금융 선진화는 고객의 신뢰와 금융인들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요즘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금융인들이 도덕적 해이를 보이고 있다"고 질책했다.
시중 은행들은 올해를 '윤리경영의 해'로 선포하고, 내부고발보호제도, 청렴계약제, 준법자기점검 프로그램 등을 마련했다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임직원들은 저마다 윤리강령 실천을 다짐하는 다양한 이벤트도 가졌다. 하지만 윤리경영은 구호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