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인가 싶다. 월드컵대회를 놓고 한국과 일본, 양국은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였다.
당시 우리나라 분위기는 월드컵을 유치하지 못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과열된 분위기였다. 마치 월드컵 유치에 국운을 건 듯 했다. 신문 방송 등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유치의 타당성을 앞다퉈 보도했고, 선정적이기까지 했다.
일본은 달랐다. 월드컵 유치를 둘러싼 사회 분위기가 우리보다 성숙했고, 유연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한번도 하지 못한 한을 월드컵 유치로 풀겠다는 그들의 열망은 수차례 출전한 우리보다 뜨겁고, 간절했음에도 그들은 냉정했다.
일본의 보수언론인 요미우리신문의 사설이 단적인 사례다. 요미우리는 월드컵 유치를 놓고 과잉경쟁으로 치닫는 양국 관계를 우려하며, 일본이 월드컵 유치를 한국에 양보할 것을 주장했다.
지역매체인 도쿄신문도 비슷한 논지의 사설을 싣고, 양국의 우호 분위기 조성을 촉구했다.
한국의 월드컵 유치만을 주장한 한국 언론과 사뭇 달랐다. 당시 한국 언론은 들떠 있는 국민들에게 평상심을 갖도록 하지 않았다. 한·일관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없었다. 선정적인 보도로 광적인 분위기에 불을 지폈다. 어른스럽지 못했다. 우리 언론의 속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태도였다.
보수언론이 그립다. 속깊고, 따듯한, 그리고 어른스러운 글이 그립다. 버릇 없이 날뛰는 손자를 보듬는 따사로운 할아버지의 손길처럼, 철없이 준동하는 막내동생을 껴안아주는 큰 형의 넓은 가슴 같은 글이 그립다.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 신문을 보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신문을 읽노라면 날카롭게 날을 세운 탓인지 유리조각에 찔린 듯 눈이 아프다. 밥맛도 떨어진다.
진짜 보수언론을 꿈꾼다. 사회의 다양한 면을 껴안을 넓은 도량을 가진 신문 말이다. 이 사회에 보수다운 보수언론이 있는지 모르겠다. 없는 것 같다.
대인애연(對人靄然·남을 대할 때 온화하게 대하라) 자처초연(自處超然·스스로 초연하게 행동하라) 등 '육연'(六然)을 가훈으로 삼은 경주 최씨의 마음 같은 아름다운 보수언론을 그래서 꿈꾼다.
유리조각처럼 뾰족한 각을 세워 자기의 주장을 휘두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있는가. 강력한 힘은 있으되 '오블리주가 없는 노블레스'는 책임없는 힘의 과시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들의 PICK!
해명도 없이 똑같은 사안에 대해 시시때때로 다른 논리와 주장을 '강하게' 펴고, 강하게 펼친 주장을 손바닥 뒤집듯 스스로 바꾸는 것은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 코드(code)'다.
보수다운 책임과 품위, 권위, 그 권위에 어울리는 절제가 없는 코드 맞추기 말이다.
책임과 품위, 권위, 절제의 반복되는 상실은 결국 신뢰를 잃게 하고, 신뢰 상실은 곧 보수로서 명성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코드 맞추기는 경주 최씨와 같이 더불어 이웃을 지키는 보수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 지키고 좇는 것에 불과하다.
밤이 깊었는데도 들판에서 더 놀겠다며 고집 피우는 아이에게 "왜 그러느냐"고 윽박지르기보다 인자하면서도 엄한 목소리로 "어두워졌으니 이제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꼭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어른스러움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