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기업들이 실적을 발표했다 하면 사상 최대인데도 어쩐 일인지 '경제위기론'이 득세하고 있다.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경제위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2분기 실적을 발표한 기업 가운데 2000년 이후 최대 기록을 세운 업체가 무려 94개사(대신증권 집계)에 달하지만 이들 실적을 크게 보도하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주식시장은 악재에 민감해지고 호재에 둔감해졌다. 10년 호황을 누려온 조선업계에서대우조선(128,000원 ▲8,700 +7.29%)등의 수주가 몇 건 해지됐다는 소식에 당장 '조선업 위기론'이 등장하고 조선주가 일제히 급락했다. 좋은 조건의 계약만 골라 수주하는데 한두 건의 투기성 계약이 해지돼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해명은 먹히질 않는다.
심지어하이닉스(876,000원 ▲46,000 +5.54%)반도체와 같은 대기업이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려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다. 당국은 공매도(주가가 떨어질 것이란 예상 아래 주식을 빌려 파는 것) 세력이 가세했다는 혐의를 잡고 조사 중이라고 한다.
'위기(Crisis)'라는 말을 다시 찾아 봤다. 생사의 분기점이 되는 갑작스럽고 결정적인 병세의 변화를 의미하는 의학용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 한국경제 상황이 위기라는 것은 흥망의 분기점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는 말이 된다. 또 조선업이 위기를 맞았다는 것은 조선업체들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변곡점이 다가왔다는 말이 된다.
살벌한 경쟁이 국경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침범하는 `초(超)경쟁' 시대에 한 나라의 경제가, 한 기업의 명운이 엇갈리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있다. "현대 산업사회에 위기가 상존한다"는 데 이의를 달기도 힘들다.
그러나 1970년대 창원공단에서 일본 기술자의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30년 넘게 쌓아온 한국 기계공업 기술의 결실인 세계 최강 조선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쩐지 조급해 보인다.
위기론은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더욱이 국가 부도 직전의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유독 잘 먹힐 수밖에 없다. IMF위기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 위기론은 흥행에서 성공했다.
더욱이 위기론은 결과가 어떻든 안전하다. 위기론을 폈다가 아무 일 없으면 "내가 경고해서 위기를 넘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좋은 결과'(아무 일 없는 것)가 모든 것을 용서해준다. 반대로 "위기는 무슨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만에 하나 위기가 현실이 되면 '나쁜 결과'가 '안이한 자'를 혹독하게 몰아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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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론은 유용할 수도 있다. 흐트러진 경계심을 자극해 미래에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도록 해준다. 조그만 실수가 큰 재앙의 단초가 될 수 있으니 미리 경계토록 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위기론은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투자와 소비가 얼어붙고 기업 활동도 위축된다. 특정 기업에 대한 유동성 위기론은 위기의 단초를 가진 기업을 아예 벼랑 끝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정치계에서 위기론이 팽배할 때는 근본 대책보다 임기응변식 대응책이 나올 전조이기도 하다. 위기상황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위기 때는 정당화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