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10월 15일 서울의 밤을 발칵 뒤집혀 논 '지강헌 사건'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유행어를 낳았다.
지강헌은 556만원을 훔치고 17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탈옥했고, 인질극 끝에 사살됐다. 비슷한 시기에 전두환 대통령 동생 전경환씨는 70억원을 횡령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자본시장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떠올리게 하는 현상들이 없지 않다. 금융감독당국이 개인 맞춤형 자산관리서비스인 랩어카운트의 적립식 투자를 제한하고 나선게 그렇다. 돱돈 있으면 투자하고, 돈 없으면 투기하라돲 즉 '유전투자(有錢投資), 무전투기(無錢投機)' 꼴이다.
적립식 투자가 사회 초년생이나 돈 없는 서민들을 위한 최고, 최선의 투자법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 감독당국이 랩의 적립식 투자를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푼돈으론 여러 자산에 투자하는 게 힘들다는 점, 이 때문에 랩이 개인 맞춤형 자산관리서비스가 아닌 펀드와 같은 단순 집합투자가 될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삼성전자 1주도 못 사는 적립금으로 개인 맞춤형 자산관리서비스가 가능하겠냐"는 얘기다. 얼핏 합당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는 랩의 기능은 물론 도입취지마저 뒤 짚는 발상이다.
국내 자본시장통합법의 모태가 된 호주는 거취식이던 적립식이던 랩 투자방법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투자 대상도 주식과 펀드는 기본이고 랩을 통해 적금, 보험까지 가입한다고 한다.
호주 리서치기관 플랜포라이프(PLAN FOR LIFE)에 따르면 작년 9월말 현재 호주의 랩 시장규모는 465조원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호주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보편화된 랩 시장으로 성장한 건 도입 당시부터 랩을 전 국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자산관리 수단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주는 왜 전 국민의 주요 자산관리 방법으로 랩이란 수단을 선택했을까? 금융시장이 갈수록 고도화되고 다양화되면서 개인이 직접 자산을 관리하는 것이 힘들어졌다는 판단에서다. 보다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개인의 자산관리를 위해 PB, FP등 전문가들을 통한 자산관리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랩의 도입취지고 핵심기능이다.
사실 증권사 입장에서 랩은 적립식보다 거치식이 유리하다. 푼돈 계좌가 많아질 수록 관리는 힘들고 비용만 커지기 때문이다. 시중에 출시된 주식형 랩의 최소 가입금액이 3000~5000만원 이상인 것도 이 같은 효율성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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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상 증권업계는 감독당국의 랩어카운트의 적립식 투자 제한을 반길 만도 하지만 실상은 반대다. 랩의 적립식 투자를 제한하면 정작 자산관리가 절실히 필요한 서민들은 혜택을 보지 못하고, 위험성이 큰 주식 직접투자로만 몰릴 수 있다는 지적한다. 사실 말이 3000~5000만원이지 이를 당장 현금으로 조달할 수 있는 서민들이 얼마나 될까.
감독당국이 우려하는 랩의 적립식 투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푼돈이 목돈이 될 때까지 안정적인 펀드 랩이나 ETF(상장지수펀드) 랩으로 자금을 관리하고, 일정규모가 되면 주식형이나 채권형 랩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면 될 일이다.
중산층의 몰락과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고민해야 하는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자들을 위한 자산관리서비스'가 아닌 '부자를 만드는 자산관리서비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