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카다피 없는 세상, 무슨 재미로…

[광화문]카다피 없는 세상, 무슨 재미로…

윤석민 국제경제 부장
2011.09.02 08:05

완장을 찬 건장한 청년들이 짝을 지어 한강 고수부지(지금의 둔치)에서 순찰을 돌던 때가 있었다. 국가적 대사인 88서울올림픽 개막 즈음에 벌어진 일이다. 이들은 부지 곳곳을 돌며 으슥한 곳에서 벌어지는 풍기문란을 단속하고 청소년에게는 귀가를 종용하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같은 폭주족의 폭음, 취객의 고성 등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단명에 그쳤다. 어떻게 깡패들에게 서울의 치안을 맡겼냐는 호된 여론의 질타 때문이다. 실제 이들은 ‘어깨’로 불리던 청년들로서 호국청년연합(호청련)이라는 단체 소속원이었다.

당시 호청련 창립회를 찾아 이 단체를 구성한 L모씨를 만날 기회를 가졌었다. 아마 사회부 초년병 기자의 치기가 발동했던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이었다면 선뜻 내키지 않은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삼성동에 새로 오픈한 S호텔에서 열린 창립회는 무게가 있었다. 사회를 맡은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L씨의 행동거지가 어찌나 조신한지 나마저 주눅들 지경이었다.

자리를 옮겨 호청련 L 회장과 독대했다. 당당한 체구에 말도 달변인 그와 마주한 1시간여만에 난 그만 감화되고 말았다. 요즘 말로 '훅' 빠져든 것이다.

그의 지론은 이랬다. 일단 그늘에 있는 젊은이들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다. 사회가 방치할수록 어둠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일정 책임과 역할을 지운다(완장의 역할). 그러면 이들도 신명나 사회를 위해 헌신하게 되고 자연히 선도된다는 논리이다(사회는 정화 일석이조).

공권력이 아무리 치밀해도 세상은 빈 곳이 있기 마련이다. L회장은 그런 곳은 그나름대로의 룰이 있다고 했다. 전두환정권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벌인 삼청교육대가 한 예이다. 죄과도 없는데 단지 조직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닥치는대로 잡아 가두며 오히려 사회 질서가 무너졌다는 견해이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 등이 날뛰듯 거리에 온갖 잡범과 조무래기들이 설치며 안전하다고 정평난 서울의 치안이 악화됐다는 설명이다. 실제 L회장의 지적대로 지금도 회자되는 대도 조세형 사건(82년), 화성 연쇄살인사건 시작(86년) 등 희대에 없던 큰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났던 시기이다.

L회장의 계획은 더 나아갔다. 조각나 있던 여러 조직을 하나의 전국조직으로 단일화하는 작업이다. 그는 용인 '큰 형님'들의 재가 아래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고 덧붙였다. 용인, 양평은 당대 장사와 주먹을 많이 배출하기로 정평난 곳이다. L회장의 롤모델이 무엇인지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김두한, 시라소니 등 협객으로 일컬어지던 진짜 ‘건달’조직의 부활이 그의 이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의 대망도 곧 사그러 들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며 시작한 ‘범죄와의 전쟁’에 L회장도 다시 휘말리고, 이후 몇몇 정치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그가 나쁜 전형으로 꼽은 ‘정치깡패’의 전철을 그 자신이 밟게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새삼 20여년전의 일이 떠오른 것은 이제 막바지에 몰린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때문이다. 앞서 미국의 보복 공격에 숨진 오사마 빈 라덴 등 이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던 인물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며 앞으로 세상 일이 심심해지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앞선다.

한켠에서는 카다피를 '미치광이'로 치부했지만 뉴욕 유엔본부앞에 텐트를 치겠다는 그의 기행이나 언변 등은 어쩜 강대국 위주의 세계 질서에 맞서 스스로 광대가 돼 세상에 던진 '블랙 코미디'일 수 있다. 그 덕에 세상은 따분하지 않고 웃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과연 이들 '악당'들이 없어진다고 세상이 평화로와질까는 또다른 의문이다. 이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제거됐지만 바그다드시내에는 아직도 연일 폭탄이 터지고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간다. 빈 라덴이 '딜레이트(delete)'됐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지는 미군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L회장의 주장대로 '큰 도둑'이 빠진 세상에 잔챙이들이 넘치며 더 혼란스럽지는 않을까. 이제까지의 경험은 나에게 '빙고'라고 외친다. 건전한 균형과 견제는 세상 어느 곳에도 필요하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관련 기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