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은행의 민영화가 불발됐다. 산업은행 민영화는 이명박 정부의 국책과제였지만 새 정부 들어 사실상 폐기됐다.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 명분은 금융 선진화에 있었다. 산업은행이 국가 신용으로 자금을 빌어 기업들에 영업하면 민간이 설자리가 없고 금융산업도 뒤처진다는 논리였다. 산업이 고도화하면서 정책금융으로서 산업은행의 역할이 줄었다는 논리도 있었다.
이에 따라 민간 출신 은행장이 들어오고 지주사 체제가 만들어졌으며 정책금융 기능은 분리됐다. 100% 민영화에 앞서 산업은행의 모회사로 만들어진 산은지주는 IPO(기업공개) 준비에 나섰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민영화를 하려면 해외 투자자 유치가 필요해 기업 내용을 공개해야 했다. 이 부분에서 실무진의 가장 큰 고민은 편중된 여신 구조였다. 여신 포트폴리오가 민간은행들과 비슷해야 하는데 산업은행은 20대 그룹에 쏠려 있었다.
당장 글로벌 신용평가사에서 신용등급을 받으려 하자 이 문제가 불거졌다. 민간은행은 상위 20개사에 대한 여신 비중이 10%대 초반이었지만 산업은행은 26~28%를 넘나들었다.
실무진은 당장 이 구조를 풀지는 못하겠지만 단계적으로 비중을 축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편중 구조는 2년여 동안 개선됐다. 일례로 한때 4조원에 달했던 STX그룹에 대한 여신도 조금씩 줄었다.
그러자 대기업에서 아우성이 터졌다. 산업은행 포트폴리오에서 쏠림현상은 줄었지만 부담이 생긴 기업들이 불황 때 우산을 거둬간다고 볼멘 목소리를 냈다.
흥미로운 건 이런 팽팽한 긴장감 속에 돌발 변수가 생긴 것이다. 재정기획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 전 회장의 등장이었다.
강 전 회장은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 결국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기능을 높이 산 것이다. 기존 실무진들의 민영화 플랜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곧이어 몇몇 그룹 총수가 산은지주를 찾았다. 그 중에는 강덕수 STX 회장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산업은행의 STX 관련 여신은 다시 예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이런 역사를 돌아보면 정책금융과 금융 선진화는 제로섬 게임에 놓인 듯하다. 어떤 선택이 한국 경제에 미래에 득이 되느냐가 고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