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질기준이 바뀌면서 입게 될 당장의 손해가 두려운 게 아닙니다. 그로 인해 독과점 구조가 형성되고 업계가 재편될 수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죠."
최근 기자와 만난 한 제지업체 고위관계자는 이달 13일부터 본격 시행되는 인쇄용지에 대한 우수재활용품(GR) 품질인증 개정안이 일부 업체에만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지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번 품질인증 개정으로 정부가 대다수 제지업체들을 관련 시장에서 퇴출시킴으로써 나머지 업체가 자연스럽게 시장을 독식하는 '독과점'을 초래하게 됐다고 성토했다.
중견·중소기업계에서 품질인증 개정을 둘러싸고 정부의 독과점 방조가 논란이 된 건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위생도기업계를 뜨겁게 달궜던 국가표준(KS) 개정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은 지난해 위생도기의 주요 부속품 중 하나인 플라스틱 트랩에 관한 KS를 개정하는 과정에서 특정 업체에만 유리한 내용으로 개정안을 만들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정부의 실책은 전문성 결여에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 실제로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담당자가 "너무 자주 바뀐다"고 지적한다. 바꿔 말하면 해당 산업에 대한 정부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해당 부처 공무원들의 탁상공론식 행청처리도 이같은 상황을 부추기는 한 요인으로 꼽힌다. 한 산업에 대한 법이나 제도를 개정하기 위해 관련 공무원들이 하는 일은 업체탐방이나 공청회가 대부분이다. 이마저도 제대로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업체를 일일이 돌아본다는 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데다 설령 돌아본다 하더라도 쫒기는 일정에 주마간산이 되기 일쑤다.
엄선된 전문가를 모아 진행한다는 공청회도 상황은 마찬가지. 대형업체 일부만 참가할 뿐 업계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업체들은 공청회를 연다는 사실조차 몰라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참석한 업체들의 의견을 중점적으로 반영해 법, 제도를 개정하다보니 특정 업체에만 유리한 내용으로 개악된다.
이같은 실책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부는 앞으로 법이나 제도를 개정할 때 관련 산업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등 좀 더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일부 업체들의 민원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업계 전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