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문종, 세자시절 '측우기' 창안… '발명의 날'로 지정


"각 도 감사(監司)가 비의 양을 보고하는 법이 있으나, 흙의 건조함과 습함이 같지 아니하고, 흙 속으로 스며든 빗물의 양이 얕고 깊음도 역시 알기 어렵사옵니다…"
농경 사회에선 잦은 가뭄과 홍수에 의한 피해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었다. 특히 강우량은 농사의 풍·흉년을 좌우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선 비의 양을 측정해왔다.
조선 초기 조정에선 농사에 참고하기 위해 각 지방의 강우량을 측정한 자료를 보고받았다. 당시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쓰인 방법으론 비가 내린 뒤 땅에 얼마나 빗물이 스며들었는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빗물이 얼마나 되는지를 재보는 게 전부였다. 정확한 수치가 아닌 추정치였다.
정확한 강우량을 잴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세종 23년, 당시 세자(훗날 문종)는 575년 전 오늘(1441년 5월19일) 현재로선 간단하게 여겨지는 방안을 내놓는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고 기록됐다.
측우기는 지름 약 15cm, 높이 약 32cm의 원통 모양이다. 비가 올 때 원통을 외부에 세워두고 빗물을 받아 측정했다. 단순해 보이지만 측우기의 원통 너비는 바람의 영향을 고려한 크기라는 분석이다. 너비가 좁으면 바람이 불 때 빗물을 받기 힘들고, 넓으면 측정오차가 커져서다.
세종은 이듬해 측우에 관한 제도를 정해 서운관에서 빗물의 깊이를 측량·기록하게 했다. 지방엔 각 관가의 뜰에 설치해 수령 자신이 측량·기록하게 시켰다. 빗물의 양은 자·치·푼 단위까지 정확히 잰 다음, 정도에 따라 8단계로 분류해 기록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각과 그친 시각까지도 빠짐없이 함께 적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정확한 강우량 측정기를 사용한 사례였다. 유럽에선 1639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베네데토 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한 것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사회의 혼란과 측우기의 유실 등의 이유로 강우량을 재는 제도가 150년 이상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영조 때에 이르러 다시 체계화됐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측우기는 1대뿐이다. 충청도 공주에서 사용됐던 보물 561호 금영측우기인데, 이마저도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71년 반환된 것이다. 측우기 받침대인 측우대도 현재는 5대(기상청 2대, 국립고궁박물관 1대, 국립중앙과학관 1대, 창경궁 연경당 1대)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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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발명일을 기념해 1957년 상공부에선 제1회 '발명의 날' 기념행사를 주관한 이후 해마다 이날 발명 유공자를 수상하고 각종 기념행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