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풀린 환율](5)선진국 불지르고 개도국은 필사적 환율방어
국제 외환시장이 연초부터 들썩이고 있다. 세계 각국이 자국 화폐 가치를 경쟁적으로 떨어뜨리는 '환율전쟁'이 올해 최고조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세를 불리면서 주요국들은 환율방어 수위를 높이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최근 원화값 급등세에도 뾰족한 대책 없이 고전하고 있는 우리나라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美, 달러 약세 덕 보고도 환율조작엔 "눈에는 눈"
"레고 블록이라도 사 모아라."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미국 싱크탱크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가 최신 보고서에서 제시한 환율조작 대응책 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요약했다.
덴마크가 자국 화폐인 크로네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미국의 달러 자산을 사재기하면 미국도 똑같은 규모로 크로네 자산을 매입하라는 주문이다.
PIIE는 또 덴마크의 국민 장난감인 '레고'만큼도 매입할 자산이 없는 나라에 대해서는 그 나라가 달러화 자산으로 벌어들인 수익에 세금을 물리라고 조언했다.
PIIE는 수출 보조금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듯 상대국이 환율조작에 들인 돈만큼 해당국 제품에 관세를 물리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문제 삼아 더 심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환율조작, 미국 경제 그리고 세계 경제 질서'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12월 나온 이 보고서는 한국 중국 덴마크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스위스 대만 등 8개국을 최악의 환율조작국으로 지목하고 이들이 환율조작을 멈추지 않으면 위에서 말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얼핏 세계 경제 질서를 해치는 환율조작을 문제 삼고 있는 듯하지만, 이 보고서의 목적은 결국 달러 가치를 떨어뜨려 미국의 수출을 늘리는 것이라고 WP는 지적했다. 미국은 이미 수조달러를 시중에 푸는 양적완화 덕분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달러 가치가 고점 대비 20%가량 하락하는 효과를 봤다.
보고서는 8개국의 환율조작을 막으면 달러 가치가 당장 10~25% 더 떨어질 것이라며 달러 가치가 10% 절하되면 미국의 GDP(국내총생산)는 1.5%, 일자리는 200만 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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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스위스 "나부터 살자"…외환시장 개입 비난 모르쇠
가장 눈에 띄는 나라는 단연 일본이다.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가 엔고(엔화값 강세) 저지를 정책 공약으로 내걸어 올해 글로벌 환율전쟁 전운을 짙게 한 장본인이다.
아베는 엔화를 무제한 푼다는 '대담한 금융완화'(양적완화) 공약 하나로 지난해 11월 총선 유세 직전 80엔을 밑돌던 엔/달러 환율을 최근 89엔대로 끌어올렸다. 엔화 가치가 그만큼 내렸다는 뜻이다.
엔화 가치는 한동안 더 떨어질 기세다. 일본 정부가 지난주 20조2000억엔(약 240조원) 규모의 새 경기부양책을 발표한 데다 일본은행(BOJ)에서도 추가 자산매입 가능성이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BOJ는 조만간 아베의 뜻대로 물가상승률 목표를 1%에서 2%로 높여 양적완화 여지를 확대할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은 최근 유럽 구제기금인 유로안정화기구(ESM) 채권 매입 계획을 밝혔다. 이 역시 엔화 약세 유도책이다.
모간스탠리를 비롯한 주요 기관투자가들은 속속 엔/달러 환율 전망치를 높여 잡고 있다. 일부는 엔/달러 환율의 연내 100엔 돌파 가능성을 내다봤다.
스위스도 국제 외환시장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스위스 중앙은행(SNB)이 지난 2011년 9월 환율 하한선을 1유로당 1.20스위스프랑으로 못 박은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SNB는 환율 하한선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수천억유로를 매입했고, 이를 다른 통화 자산으로 다변화하는 과정에서 호주달러와 스웨덴의 크로나 가치를 끌어올려 빈축을 샀다.
최근에는 대안 통화로 파운드를 대거 매입하고 있다. 영국 텔레그라프는 이 여파로 스위스와 영국이 최근 저강도 환율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SNB는 그러나 외환을 무제한 사들여 환율 하한선을 사수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G10, 구두 개입↑…신흥국도 환율방어 공세 강화할 듯
수출 말고는 경제 회복세를 떠받칠 동력이 마땅치 않은 신흥국들은 환율방어에 더 필사적이다. 브라질과 터키가 대표적이다. 신흥국들은 올해 선진국에 맞서 더 적극적인 환율방어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귀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지난 2010년 주요 정부 당국자 가운데 처음으로 수면 아래 있던 국가 간 통화 가치 약세 유도 경쟁의 실체를 폭로했다. 그는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풀린 자금이 신흥국으로 유입돼 현지 화폐 가치를 끌어올렸다고 비난했다.
이후 브라질은 기준금리를 잇따라 낮추고, 단기 투기자금인 핫머니에 부과하는 금융거래세(IOF) 세율을 수차례 높이는 헤알화 약세 정책을 썼다. 그 결과 달러 대비 헤알화 가치는 2011~12년 20%가량 하락했고, 2011년 653억달러로 사상 최대였던 순유입 자금은 지난해 164억달러로 급감했다.
이 여파로 물가상승률이 5%를 넘어섰고, 2010년 7.5%였던 성장률은 지난해 1%로 둔화된 것으로 관측되지만 만테가는 올해부터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며 환율방어 의지를 꺾지 않았다.
터키 중앙은행은 환율방어의 일환으로 금리 변동폭 상한선을 낮추는 저금리 정책을 통해 경기부양에 나섰다. 덕분에 지난해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로부터 18년 만에 '투자적격' 등급을 따냈다.
이런 가운데 애덤 콜 로열뱅크오브캐나다(RBC) 외환 부문 책임자는 최근 주요 10개국(G10) 중앙은행들의 외환시장 구두 개입 수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체 고안한 G10 중앙은행의 평균 구두개입지수가 지난해 말 4를 기록, 2011년 초에 비해 1포인트 올랐다고 전했다. 0~10 범위인 이 지수는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 의지를 반영하는데, 최근 3년간 줄곧 오름세를 지속하면서 G10 중앙은행들의 환율방어 전략이 강화될 것임을 시사했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말하는 G10은 미국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영국 일본 캐나다 스위스 호주 뉴질랜드 스웨덴 노르웨이로 이들 선진국의 외환시장 개입은 신흥국을 자극할 게 뻔하다.
데이비드 블룸 HSBC 외환 부문 책임자는 "모든 나라가 동시에 자국 통화 가치를 약세로 이끌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스위스에 이어 일본이 나섰고, 북유럽 국가들이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한편 터키는 경기과열에도 금리를 낮추고 있다"고 말했다.